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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86세 최고령’ 충정아파트

조선비즈 조은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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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86세 최고령’ 충정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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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오후 방문한 충정아파트는 외관 곳곳에 벗겨진 페인트칠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비가 오는 흐린 날씨 탓에 외벽 곳곳에 갈라진 자국이 유독 선명하게 드러났다. 1937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86년을 서울 도심에서 버텨왔다. 입구에는 ‘충정아파트’ 현판이 붙어 있었고, 유리문에는 구조안전 위험시설물이라는 점을 알리는 노란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 최고령 아파트인 ‘충정아파트’가 주목을 받은 건 지난 6월이다. 서울시가 도시계획위원회를 열고 ‘마포로 5구역 제2지구 도시정비형 재개발구역 및 정비계획 결정안’을 수정가결하면서다.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 역세권에 위치한 ‘충정아파트’ 자리에는 28층 192가구 아파트가 들어서게 됐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지난 26일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충정아파트의 입구./조은임 기자

지난 26일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충정아파트의 입구./조은임 기자



충정아파트는 2020년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스위트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은둔형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가족을 잃고 이사간 낡은 아파트 ‘그린빌’에서 이웃들이 괴물로 변하는 줄거리인데, 바로 이 낡은 아파트를 구현하는데 영감이 된 곳이 충정아파트다. 실제로 연출자는 충정아파트를 방문해 살펴보기도 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된 충정아파트 내부는 하늘이 보이는 중정 형태의 구조다. 중간에 커다란 기둥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살림살이가 복도에 빼곡히 쌓여 있었다.

1979년 9월 재개발구역으로 처음 지정된 마포로 5구역 제2지구는 40년이 넘게 개발이 지연돼 왔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처음에는 건축주였던 도요타 다네마쓰의 이름을 따 ‘도요타 아파트’로 불렸다. 당시에도 직주근접이 뛰어나 상당히 인기가 많았었다. 도심과 가까운 서대문구에는 미동아파트(1969), 서소문아파트(1972) 등 초기 형태 아파트가 여럿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의 이유에서였다.

박원순 전 시장이 있던 2019년 충정아파트를 문화시설로 이용하겠다는 방안이 제시된 바 있다. 하지만 주민들이 반대해 무산됐다. 오세훈 시장으로 바뀌고 나서야 재개발이 추진됐다. 오랜시간 재개발 사업이 멈춰서 있어서 인지 주민들은 재개발 추진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수 십 년 오락가락 했던 만큼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회의감이 엿보였다.

충정아파트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아직 한 집을 빼고는 모두 거주를 하고 있는 중”이라면서 “재개발이니 철거니 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고 했다.


지난 26일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충정아파트의 외관./조은임 기자

지난 26일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충정아파트의 외관./조은임 기자



실제로 충정아파트 1층에 들어선 상가 점포는 모두 성업 중이었다. 편의점과 김밥전문점, 인테리어 삼무실 부동산 중개소, 커피전문점, 닭갈비 식당 등 공실은 없었다. 일부 점포 주인들은 충정아파트 거주자이기도 했다. 86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내부의 구조변경이 집주인들 위주로 진행되면서 평형은 28개로 전해진다.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건 40가구 중 두 건으로 전용 93㎡가 보증금 3000만원에서 월세 50만원, 전용 86㎡는 매매 8억에 올라와 있었다. 가장 최근 거래는 2021년 9월 14일로 전용 90㎡(1층)가 6억원에 거래됐다.

1층 점포를 소유하고 있는 한 주민은 “생각보다 넓은 평수도 있고 살기가 아주 불편하지 만은 않다”면서 “재개발이 언제될 지 몰라 아예 신경을 끄고 있다”고 했다.

여느 재개발·재건축 사업지와 마찬가지로 재개발 추진을 두고 반대하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도 들렸다. 특히 불법 증축된 5층의 경우 소유주가 재개발 후 입주권을 받을 수가 없다. 아직 조합설립 인가도 받지 않은 단계로, 철거 시기도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먼저 조합설립인가를 받고 이후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의 과정을 거쳐야 이주·철거가 가능하다.


지난 26일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충정아파트. 출입문에는 구조안전 위험시설물임을 알리는 게시물이 붙어있다./조은임 기자

지난 26일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충정아파트. 출입문에는 구조안전 위험시설물임을 알리는 게시물이 붙어있다./조은임 기자



충정로의 한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충정아파트는 역세권으로 입지가 좋아 기존에 살던 사람들은 재개발 입주권을 받게 될 것”이라면서 “서울시에서 나서서 빠르게 추진을 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마포로 5구역 제2지구 도시정비형 재개발 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아직 조합설립도 안된 단계여서 언제 철거가 이뤄질 지는 알 수 없다”면서 “조합이 설립되고 공사가 어떻게 진행될지 갈피가 잡혀야 철거 시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은임 기자(goodnim@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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