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혐오’ 정당화 위해 짜맞춘 세계관…‘참’도 ‘교육’도 없다
2020년부터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되고 있는 <참교육>. 이른바 ‘사이다 전개’로 국내외에서 인기를 모으는 한편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참교육> 웹툰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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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성희롱 사태, 성적 모욕에 취약한 여성 교사라는 젠더적 맥락을 봐야…‘정의로운 체벌’이라는 접근은 도움 안돼
강제력 있는 구타와 무기력한 비폭력만 존재하는 ‘참교육’의 세계…폭력 이외의 다양한 문제해결 방법은 고려되지 않아
악의적으로 재현된 페미니즘 교육 장면, 소통의 토대 무너뜨리며 또 다른 ‘갈라치기’…남는 건 혐오 대상 응징하는 쾌감 뿐
한국의 교권 문제의 단면을 드러내는 이번 교원평가 성희롱 사태와 <참교육>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면, 이 사건이야말로 <참교육>이 재현하는 정의로운 폭력의 쾌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그 폭력의 알리바이로 삼는 교권이 실은 얼마나 편의적으로 얄팍하게 활용되는지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논의를 조금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 교원평가가 교육을 서비스로 보고 소비자 입장에서 평가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교사 사회 보편에 유의미한 피드백으로 작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것이 보편적 차원에서의 문제라면, 이번 성희롱 사건처럼 교사 내에서도 성적 모욕이라는 특수한 폭력에 취약한 여성 교사라는 젠더적인 맥락에서 발생하는 문제 역시 존재한다. 이는 앞의 차원에 환원되지 않는다. 최근 경향신문 기사에선 교원평가에 학생 개인의 쌓인 감정을 적거나 정당한 수업 진행에 대한 부정적 반응을 소개한 바 있는데, 여성 교사를 대상으로 한 성희롱은 이처럼 평가를 가장한 악플 중 한 사례로 환원되기보다는 그 자체로 고유한 부정의라고 보는 게 온당하다. 그 이유는 너무 간단하다. 교원평가 제도가 생기기 이전에도 혹은 <참교육>이 그리워하는 체벌 금지 이전의 세상에도, 남학생들에게 여성 교사는 만만한 성적 희롱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교사 기분에 어긋나는 것만으로 학생을 주먹과 발로 마구 구타하기도 했던 1990년대의 야만적 풍경에서도 남학생들은 발에 거울을 끼워 여성 교사의 치마 밑을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즉 교원평가를 통해 과거엔 없던 교권 침식이 벌어지는 것과 별도로, 여성 교사를 향한 성희롱성 답변은 이미 과거부터 존재하던 젠더 차원의 부정의가 새로운 약한 고리를 통해 터져 나온 것에 더 가깝다. 약한 고리로서의 교원평가 제도를 보완 혹은 폐지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건 그래서다.
이처럼 심각한 교권 침해의 실제 사례에서 정의로운 체벌, 강한 교사의 시대로 회귀하자는 <참교육>의 접근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원인과 결과를 엉뚱하게 연결한다. <참교육>의 연재 초기 이미 청소년인권행동단체 아수나로에선 현직 교사 인터뷰를 통해 체벌이 금지되어 학교폭력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완전히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가령 <참교육> 첫 에피소드에선 국회의원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교사들의 방관 아래 학교폭력을 벌이는 학생 이야기가 나오는데,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차종훈(이종혁) 캐릭터를 통해 잘 재현됐듯 교사의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에도 잘사는 집안 학생은 그 폭력적 권력의 비호 아래 자신의 폭력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었다.
<참교육>이 낭만화하는 정의로운 체벌의 시대는 존재한 적 없으며, 그런 야만의 시대를 건너고자 조금씩 노력한 결과가 현재의 학교다. 물론 그 과정에서 교원평가를 비롯해 학생과 학부모가 스스로를 교육 서비스의 소비자로 이해하는 부작용도 벌어졌다. 하버마스의 개념을 빌리면, 근대사회가 고도화 및 복잡화되며 효율성에 기반한 화폐경제와 관료행정이 일상의 소통을 통한 문제해결을 대체하는 생활세계의 식민화에 해당한다. 하지만 근대의 병리적 현상을 치유하기 위해 전근대적 폭력으로 회귀하는 건 당연히 앞뒤가 맞지 않는 처방이다. 애초에 교권을 가장한 폭력 아래선 소통을 통한 해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더더욱.
마음껏 휘둘러도 괜찮은 폭력의 근거를 마련하려다 엉뚱한 인과를 설정한 작품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선 세계를 스스로 설정한 인과에 맞춰 충분히 왜곡해 재현해야 한다. <참교육>의 세계엔 오직 강제력 있는 구타와 무기력한 비폭력만이 존재한다. 세상엔 구타를 제외하고도 충분한 강제성이 있는 다양한 문제해결 방법이 있다는 건 고려되지 않는다. 각 에피소드마다 ‘참교육’의 대상은 독자 다수가 때려주고 싶을 만큼 비호감적인데 오직 맞지 않아서 비호감적인 행위를 지속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비폭력이 소용없는 건 폭력만이 소용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 허술한 순환논법은, 하지만 비호감적인 대상이 맞는 걸 보고 싶은 독자 다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한 충분히 합리적인 인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우선 저열한 타협이지만, 특정 대상에 대한 악의적 정념을 왜곡된 세계 재현으로 정당화해준다는 점에서 다분히 악하다. <참교육>의 수많은 문제적인 에피소드 중 최악인 페미니스트 여성 교사에 대한 악의적 재현은 이러한 문제가 응집된 사례다. <참교육>의 주요 독자층이 혐오하는 대상으로서의 페미니스트를 마음껏 때려도 될 상황을 만들기 위해선, 그들을 오직 폭력으로서만 제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 묘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스스로 믿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선 피해 사실 자체가 없어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페미니스트 교사 조직의 아동 세뇌 음모론에 편승하는 무리수를 둔다.
여기서 다시 실제 교권 피해 사례로서의 교원평가 성희롱과 <참교육>의 세계를 대조해보자.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악성 민원인으로서의 여성 보호자가 교사를 마음껏 음해하고 괴롭혀도 교사가 학교의 보호를 받지 못하지만, 페미니스트 여성 교사는 남자 보호자에게 모욕을 하고 학생에게 ‘나는 차별주의자입니다’라는 팻말을 달게 해도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걸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이미 <참교육>의 세계 묘사는 일관적이지 못하고 편의적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과의 대조를 통해 그러한 면모는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페미니스트 여성 교사가 학생들에게 부당한 성평등 교육을 하며 교사의 정당한 권위가 훼손된 것이 아니라, 여성 교사를 성적 대상 혹은 성적 모욕의 대상이 아닌 교사이자 인간으로 존중할 수 있도록 페미니즘 교육을 할 수 없는 환경 속에 남학생들이 그따위로 성장해 교권을 훼손하는 것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
페미니스트 비밀 집단이 암암리에 학생들을 세뇌하기는커녕 학생들의 여성 혐오 정서에 피해를 입을까봐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드러낼 수 없는 게 현실에 더 가깝다. 이런 실재와 비교해 <참교육>이 문제인 건 현실을 잘못 이해해서가 아니다. 잘못 이해한 현실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안사실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책임이자 무책임한 부분이다. 음모론에 근거한 해당 에피소드 연재 당시 “초등학생 페미니즘 사상 주입하려고 초등 여교사들끼리 사이트 만들어서 정보 주고받고 했던 거 저격하는 거네”라는 댓글이 6만8000명 추천을 받아 베스트 댓글이 되었다. 작가의 망상에 가까운 왜곡된 페미니즘 교육 장면이 해당 댓글과 함께 세상에 실재하는 사건이 된 셈이다. 이것이 탈진실 시대의 대안사실이다. 작중 나화진은 ‘양성평등’ 교육 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다며 왜곡된 페미니즘 교육이 세상을 남녀 반으로 갈라 혐오하게 만든다고 지적하지만, 정작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고 싶은 이들이 현실 대신 대안사실을 믿는 방식으로 세상은 갈라지고 소통의 토대는 무너진다. 남는 건 단지 혐오 대상을 응징하는 ‘참교육’의 쾌감뿐이다.
하여 그들이 즐기는 ‘참교육’엔 당연히 ‘교육’도 없지만 무엇보다 ‘참’이 없다.
이제 그 책임을 물을 때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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