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역사에서 대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농업과 교통의 중심지인 한강이었다. [1]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신라 진흥왕 순수비. 백제를 꺾은 진흥왕은 원래 비석이 있던 자리인 북한산 비봉에 올라 승리를 자축했다. [2] 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 백제 왕성에서는 항아리 속 귀중품 등 전쟁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3] 1977년 서울 구의동 유적에서 발굴된 고구려 토기 장동호. 고구려군이 달아나면서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국립문화재연구원·서울대박물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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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은 백제와 조선의 왕도였고, 지금은 대한민국의 수도다. 서울이 중시된 이유로 한강의 이로움을 손꼽는 견해가 많다. 한강은 내륙 곳곳과 바다를 이어주는 거대한 물줄기였고 때론 외침을 막아주는 자연 해자로도 기능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나라의 명운을 걸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을 벌였다. 최종 승자는 고구려도 백제도 아닌 ‘후진국’ 신라였다. 신라가 삼한일통의 유력 후보였던 두 나라를 제치고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었던 계기는 무엇이고 각축전 결과에 따라 세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몽촌토성에 담긴 백제인의 피란사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 왕도 한성을 쳤다. 개로왕은 성문을 굳게 잠근 채 싸우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고구려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는 중과부적(衆寡不敵)임을 알고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린 채 성문을 열고 달아나다 고구려군에 사로잡혀 참수됐다. 한성은 약탈의 대상이 됐고 수많은 백제인이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돼 고구려로 향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한성백제가 최후의 날을 맞은 것이다. 그 시기 백제 왕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었다. 두 성에선 오랜 세월 땅속 깊숙이 밀봉됐던 백제사의 아픈 기억들이 하나둘 여과 없이 드러났다. 1925년 대홍수 때 발견된 항아리 속 귀중품은 전란의 와중에 급히 묻은 것으로 보이고, 1990년대 이래 진행된 성 내부 발굴에서는 화마가 휩쓴 집터들이 발견됐다. 몽촌토성에서는 고구려군이 주둔할 때 썼던 토기가 다수 발견되기도 했다.
한 세기 전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기세 등등’ 백제가 왜 이토록 쇠약해진 걸까. 그 이유는 개로왕이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무리한 토목공사로 나라 곳간을 고갈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북위에 표문을 올려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지만 북위는 당사자 간 해결을 조언하며 거절했다. 이 사건은 고구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첩자로 보냈고, 도림은 바둑 실력을 미끼로 개로왕에게 접근해 환심을 산 데 이어 국정에 개입하여 백제를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한편, 개로왕은 동맹국 신라의 군사 지원을 믿었으나 구원군이 채 도착하기 전 참수됐고 왕도는 함락됐다.
서울 구의동서 발견된 고구려군 요새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는 불안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고구려가 지금의 대전, 세종까지 내려와 백제를 압박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문주왕과 동성왕은 신하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도 무령왕 때에 이르러 국세를 회복하여 여러 번 고구려를 깨뜨리고 다시금 강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한성 수복이란 꿈은 숙제로 남겨졌다.
성왕은 선왕의 유지를 실현하고자 신라군을 끌어들여 고구려군을 축출하기로 했다. 진흥왕과의 협상을 통해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하류는 백제가 영유하기로 약조하고 551년 함께 고구려군을 기습했다.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 1977년에 발굴됐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소재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무덤처럼 생긴 구조물 하나가 확인됐다. 겉흙을 걷어내자 내부에서는 다량의 숯덩이, 불에 탄 흙과 함께 다양한 철기가 쏟아졌다. 조사단은 백제의 무덤이거나 빈소일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20년이 지난 후 유적의 성격은 고구려 요새로 수정됐다. 나제 연합군의 기습 공격에 성채가 불타자 고구려 병사들이 가재도구, 무기, 농기구 등 모든 것을 버리고 황급히 달아난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성을 수복하려던 성왕의 꿈은 눈앞에서 물거품으로 변했다. 신라가 배신하고 한강 하류까지 차지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두 나라는 554년 관산성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성왕을 비롯하여 대신, 장졸 등 백제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백제는 다시금 국가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전락했다. 백제가 이러한 위기에 봉착한 데는 성왕의 책임도 컸다. 그는 영웅군주로서의 자질을 지녔으나 개로왕과 마찬가지로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했으며 너무나 ‘순진’했다. 그는 동맹국 신라를 신뢰했고 신라가 배신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북한산에 세운 신라의 승전비
진흥왕은 오랜 라이벌 백제의 예봉을 꺾은 후 승리를 자축하며 555년 북한산에 올랐다. 그는 사방을 조망하며 가슴 벅찬 감회에 젖었을 듯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땅은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고 대왕으로 불리던 그의 땅, 당대의 표현을 빌리면 ‘대왕국토’였기 때문이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지증왕이 천명한 “덕업일신 망라사방(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온 세상을 덮는다)”이라는 목표를 향해 큰 걸음을 내디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후 신라는 935년 고려에 멸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한강 유역을 빼앗기지 않았다. 한강 물길은 서해 바닷길로 이어져 대륙을 향해 포부를 펼치려던 신라에는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하였고 마침내 삼한일통의 위업 달성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 확보를 기념해 북한산 비봉에 기념비를 세웠으니 그것이 바로 국보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다. 학계에선 551년 진흥왕이 북한산에 올랐을 때 세운 것으로 보기도 하고, 그보다 늦은 561∼568년 어간에 세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비석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진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금석문 연구에 일가견이 있던 ‘조선 최고의 감식안’ 추사 김정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1816년 북한산에 올라 기존에 무학대사비로 알려져 온 이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앞으로도 한강 유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물고 물리는 갈등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적들이 속속 발굴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잊혀진 삼국시대의 역동적 모습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해명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가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우리는 백제의 길을 걸을 것인가, 신라의 길을 걸을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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