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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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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장인열전] 목판에 아로새기는 조상의 혼…박영덕 각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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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기슭 '운봉 서각원' 운영, 공예대전 휩쓸며 34년째 외길

서울대 규장각 목판 복원 참여…"목판인쇄술 체계적 기록할 것"

[※ 편집자 주 = 자고 나면 첨단제품이 쏟아지는 요즘이지만, 옛 방식을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전통의 맥을 잇는 장인들도 있습니다. 비록 이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물건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않더라도 조상의 혼이 밴 전통문화를 후대에 전수한다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들이 선보이는 전통문화의 가치와 어려운 여건에도 꿋꿋하게 외길을 걷는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사회적 관심과 예우 분위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충북 장인열전'을 매주 금요일 송고합니다.]

연합뉴스

목각판 보여주는 박영덕 장인
[촬영 천경환 기자]



(청주=연합뉴스) 천경환 기자 = "툭툭툭툭, 탁탁탁탁…"

조각칼 머리에 망치 부딪히는 소리가 적막한 공방 안을 가득 메운다.

경쾌한 음률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사이 목판 위 비스듬히 누운 칼끝 아래서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활자가 차츰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칫 활자 끝이라도 엇나가지 않을까 숨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칼끝을 움직이는 장인의 얼굴에는 전통을 잇는 자부심을 넘어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보은군 장안면 속리산 기슭에는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28호인 각자장(刻字匠) 박영덕(57) 씨의 2층짜리 공방이 있다.

출입문 위에 붙은 이름은 '운봉 서각원'(雲奉 書刻院). 구름 위로 치솟은 봉우리라는 의미로 그의 스승이 지어준 호(號)를 따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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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새겨 넣는 박영덕 장인
[촬영 천경환 기자]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인쇄물이 쏟아져나오는 시대지만 박씨는 이곳에서 34년 동안 옛 문헌을 살피며 목판에 글씨와 그림을 새겼다.

취재진이 찾아간 6일에도 그는 개량한복을 입은 채 목판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작업대에는 손때 묻은 조각칼들이 가지런히 놓였고, 나뭇조각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박씨는 "400글자 정도를 새기는 데 일주일가량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며 "글씨의 모양에 따라 칼 종류와 사용 방법을 달리해야 하는 세심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각자장은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장인을 일컫는다.

통상 '서각'이라고도 불리는 각자의 역사가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신라시대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고려 팔만대장경 등이 목판 인쇄물인 점을 고려하면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조상들의 삶 속에 자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 전 각자는 책 복제본을 만들어 정보를 기록하는 힘인 동시에 고궁이나 사찰에 거는 현판에 글자를 새기는 예술로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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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든 작품 둘러보는 박영덕 각자장
[촬영 천경환 기자]



가난한 농가의 아홉 남매 속에서 자란 박씨는 어린 시절 취미 삼아 나무에 조각을 새기다가 각자 장인의 길로 들어섰다.

남의 땅을 빌려 어렵게 생계를 꾸리던 시절 그는 고단한 일상에도 틈날 때마다 빈 나무판 위에 그림을 새기곤 했는데, 그의 재능을 본 지인이 당대 이 분야에서 명성 떨치던 동천서각의 송인선 선생을 소개해줬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보따리를 싸 들고 그의 문하생이 된 박씨는 이후 3년 넘게 서각과 논밭을 오가는 주경야독으로 기능을 익혔다.

모든 전통기술이 그러하듯이, 각자는 재료 준비부터 깊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하다.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우선 단단하고 벌레와 습기에 강한 목재를 구해 소금물에 절이고 말리는 과정을 5년간 반복한다.

그러고는 적당한 크기로 자른 나무 표면을 대패와 사포질로 매끄럽게 다듬는다.

보관 과정에서도 목판끼리 눌려 붙지 않도록 가장자리에 소나무 토막(마구리)을 끼워 바람이 통하게 한다.

'치목'(治木) 과정이 끝나면 드디어 목판에 혼을 불어넣는 작업이 시작된다.

각자는 글자를 똑바로 새기는 '정서각'(正書刻)과 좌우를 바꿔서 새기는 '반서각'(反書刻)으로 나뉜다.

정서각은 주로 현판 제작 등에 사용되고, 반서각은 종이에 활자를 찍어내기 위한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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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작품에 쓰이는 나무
[촬영 천경환 기자]



어느 쪽이든 종이에 글자를 써서 목판에 붙이는 작업이 우선이다. 이때 글씨가 더 잘 비치도록 기름을 바르기도 한다.

그다음은 조각칼로 나무의 성질을 다스리면서 새기는 작업이다.

글자를 드러나게 하는 양각과 움푹 패게 하는 음각, 둘을 섞은 음양각이 있는데, 3㎜ 깊이로 칼을 넣고 마모를 최소화하는 세밀한 작업이다 보니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박씨는 "각자는 오랜 작업 과정을 견딜 수 있는 인내력은 물론 섬세한 조각과 서예 실력이 필요한 종합예술"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목판은 먹을 입혀 한지 위에 찍어내는 인출 과정을 거친다.

그는 "먹의 농도, 한지의 두께 차이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어 인출에 관한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다"며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 탓에 그만둘까 고민한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험난했던 입문 과정을 설명했다.

고된 수련을 통해 기술을 연마한 그는 1996년 정부에서 추진한 농어촌특산단지 육성사업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공방을 차렸다.

첫 개인 공방이자 영업장으로 각자 체험장 등을 운영하기 위해 제법 큰 시설을 갖췄는데 얼마 가지 않아 IMF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대출이자를 감당하느라 공사판 일용직을 전전하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도 그는 조각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금속활자장 오국진 선생의 제안을 받아 금속활자를 만드는 법을 배웠고, 이후에는 서예와 도자기를 배워 전통문화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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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에 먹칠하는 박영덕 각자장
[촬영 천경환 기자]



여러 분야를 섭렵하며 자신만의 각자 기술을 연마한 그는 각종 공예전에 수십차례 입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2014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 훈민정음해례본 목판을 출품해 문화재청장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전승공예대전에서 훈민정음 언해본 책판 및 능화판으로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2018년에는 제28호 도 무형문화재 각자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현재 그는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목판 복원사업에 참여해 사라져 가는 전통 인쇄문화의 명맥을 잇고 있다.

사명감 하나로 외롭게 걸어온 길을 이제는 제자이자 동료인 세 자녀가 동행하고 있다.

문화재수리기술자인 큰딸 해원(31) 씨와 둘째 딸 지원(28) 씨는 아버지를 도와 규장각 목판 복원에 참여하면서 젊은 감각을 살려 전통문화를 가미한 카페 운영을 구상 중이다.

막내인 아들 성원(25) 씨는 각자 기능을 전수하기 위해 충북대학교 종이목재학과에서 공부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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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에 열중하는 박영덕 각자장
[촬영 천경환 기자]



박씨는 "아이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할 때 선뜻 허락할 수 없었다"며 "전통예술도 열심히만 하면 남부럽지 않은 소득을 올리도록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짊어진 사명은 훗날 많은 사람이 따라 할 수 있도록 목판인쇄술을 체계적으로 기록해 나만의 기술서를 만들어 기반을 다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kw@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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