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전람회 구경다니던 15살 중학생 50년 만에 무형문화재로 성장
박물관 그림 통째로 습작해 독보적 기능 연마…딸에게 기법 전수
하늘을 찌를 듯 기암괴석이 솟구치더니 이내 희뿌연 안개가 산 중턱을 휘감는다. 하천 옆 버드나무 가지는 바람에 몸 둘 곳을 잃은 듯 흐드러지게 흩날린다.
인두로 낙화를 그리는 김영조씨 |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 낙화장(烙畵匠) 기능보유자인 김영조(69)씨에게 인두 한 자루는 붓 그 자체다.
그의 작품은 한 폭의 산수화다. 얼핏 보면 사실적 묘사 위주의 서양화에 가깝기도 하다.
낙화는 '지질 낙'(烙)과 '그림 화'(畵)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인두를 달궈 한지나 나무, 가죽 등 표면을 지지는 방식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50년간 그의 손을 떠나본 적이 없는 낙화는 일반인에게 낯선 분야지만 수백년 역사를 지닌 전통 공예·회화 기법이다.
인두받침대와 인두 |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규경(1788∼1863년)이 정리한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낙화를 잘해 한양의 양반 사이에서 이름을 날렸다는 박창규(朴昌奎, 1796∼1861년)에 대한 언급이 있다.
김씨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그 분야로 나가는 게 인생의 소망이었다.
15살 나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동양화와 서양화에 대한 안목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김영조씨가 2015년 그린 '視(see)' |
마침내 그는 2010년 10월 충북도 지정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됐고, 2018년 12월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며 꿈을 이뤘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 대학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유명 화가가 되고 싶은 꿈과 극장 간판을 그리며 밥벌이를 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김씨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19살이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972년 한 신문에 실린 '낙화 수강생 모집' 기사를 본 것이다.
인터뷰 하는 김영조씨 |
이때 스승인 전창진씨를 만난 김씨는 '산수화가 참 멋있다'는 생각에 알지도 못했던 낙화의 길에 빠져들었다.
낙화는 화로 안 뜨거운 숯에 인두를 달군 후 새끼줄에 문질러 재를 털어내고 적정 온도를 맞춰가며 그려내는 그림이다.
무더운 날에도 숯불과 벌겋게 달아오른 인두를 끼고 살아야 하니 작업환경이 열악하기 그지없다.
인두에 붙은 재가 바람에 날려 한지에 묻을 수 있어 선풍기도 켤 수 없었다고 한다.
잠잘 시간을 줄여가며 사군자와 꽃, 인물 등을 배우던 그였지만, 30∼40명 되던 동기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며 그의 수강생 생활은 2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작업 중인 김영조씨 |
김씨는 남아 있는 수강생들과 따로 모여 7년가량 더 연습했지만 이번엔 생활고가 앞을 가로막았다.
"희망이 없었어요. 경제적으로도 너무 어려웠고요. 낙화는 당시 아무것도 아니었거든요. 예술로 취급받지 못했고 화가로도 대접받지 못했어요. 손을 놔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방황을 많이 했지요"
고민 끝에 그는 1970년대 말 속리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한지 대신 나무판을 인두로 지져 만든 낙화 기념품을 관광객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충남 부여가 고향인 그가 삶의 터전이 된 충북 보은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관광 기념품이 변변치 않았던 때라 낙화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단일 품목 중 속리산에서 가장 많이 팔린 기념품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작품에 열중하는 김영조씨 |
덕분에 김씨의 생활은 폈고 자녀도 결혼시켰다.
형편이 나아지면서 낙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더 커졌다. 유명 그림을 인두로, 붓으로 베끼며 연습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그림은 모조리 그려 봤다고 한다.
습작을 어느 정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수십만점은 될 것"이라며 "하루에 15시간씩 쉬지 않고 연습했는데 강철로 된 인두받침대를 1년에 1개씩 끊어먹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낙화는 예술적 가치가 큰 회화작품인데, 대충대충 관광기념품을 만들어 팔다 보니 인정을 못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든 것이다.
이때가 1995년께다.
"인두로 지질 때는 이렇게" |
"생활을 유지하면서 예술을 할 수는 없다"는 각오로 가게를 과감히 처분한 그는 2000년 지금의 작업장과 전시장을 짓고 본격적인 낙화 연구를 시작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10년만인 2010년 10월 1일 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됐다. 다음 목표는 국가무형문화재였다.
그러나 갈 길은 멀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에는 낙화가 없었고 예술적 가치를 이해하는 전문가도 드물었다.
옛 서적과 문헌을 찾아 전통 회화기법이라는 점을 설득한 끝에 2018년 12월 27일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낙화를 수준 이하로 보는 분들에게 진짜 낙화를 보여드려야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는 그는 "이젠 소원을 다 이뤘다"고 홀가분하게 말했다.
김영조씨가 그린 프란치스코 교황 |
그의 작품은 2014년 8월 음성 꽃동네를 찾았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전달됐다.
가로 43㎝, 세로 56㎝, 두께 3㎝의 단풍나무에 교황이 아기를 안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모습인데, 당시 충북도는 김씨로부터 낙화를 전달받아 교황에게 선물했다.
지금은 그의 딸이 아버지로부터 낙화를 전수받고 있다.
k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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