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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택이 ‘졸렬택’과 화해하는 방법 [박강수 기자의 인, 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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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졸렬한 타율관리’ 이후 박용택의 11년

“사전에서 ‘졸렬’ 찾아보니 딱 그 시절 저더라”

과오 인정하고 안티의 언어 공유하는 스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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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택이 지난 3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은퇴식 및 영구결번식에서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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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3일) 프로야구 은퇴식을 치른 박용택(43)은 통산 안타 수 만큼이나 별명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무위키를 보면 ‘박용택 선수 경력’ 항목 글자 수가 약 1만9000자, ‘박용택 별명’ 항목 글자 수가 약 1만8000자다. 프로 경력이 곧 별명의 역사인 셈. 따라서 박용택의 마지막을 기리는 축제는 그의 별명을 기념하는 축제여야 했다. 이날 엘지(LG) 트윈스 선수들은 이름 대신 ‘○○택’ 별명 시리즈를 달고 경기를 뛰었다.

박용택이 직접 엄선했고, 후배들이 골라 달았다. ‘용암택’ 김현수, ‘찬물택’ 이민호, ‘팬덕택’ 유강남, ‘울보택’ 채은성, ‘휘문택’ 임찬규 등등. 경기 전 기자실을 찾은 박용택은 별명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뜸 이렇게 말해 기자들을 웃겼다. “제가 지금 제일 실망스러운 게 ‘졸렬택’을 아무도 안 했다는 거예요.” 그는 말을 이었다. “저는 항상 제 입으로 (졸렬택 이야기를) 먼저 꺼냈었고, 이게 또 롯데전이니까 더더욱… 제 방식대로 푸는 거거든요.”

야구팬들에게 유명한 ‘졸렬택 사태’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규리그 순위는 이미 결정 났고 개인 타이틀 경쟁만 남은 9월 말, 타격왕 레이스의 쌍두마차는 박용택(타율 0.374)과 롯데 자이언츠의 홍성흔(0.372)이었다. 고작 0.002 차이. 막판 25일 롯데와 엘지가 맞붙은 날 박용택은 출전하지 않았다. 미세한 우위를 굳히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엘지 투수들은 홍성흔을 4연타석 볼넷(5타석 1타수 무안타)으로 거르며 그의 타율을 0.371까지 깎았다. 한 경기가 더 남았던 박용택은 최종 0.372로 그해 타격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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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전하는 <에스비에스>(SBS)의 2009년 9월 25일 자 리포트 화면. <에스비에스> 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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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이후 “졸렬한 타율관리”라는 절묘한 문구로 회자되면서 박용택의 이미지를 실추시켰고, 그는 은퇴 전까지 11년을 ‘졸렬택’이라는 오명과 함께 지내야 했다. 본인도 “2009년 이후 제 기사 댓글을 안 읽는다”고 했을 정도로 아픈 별명을 안은 채 박용택은 절치부심했다. 그 뒤로 4번의 골든글러브를 추가했고 한국프로야구 사상 가장 많은 경기에 나서 가장 많은 타석에 서고 가장 많은 안타를 친 ‘올타임 안타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역사 속에 새겨넣었다.

동시에 ‘졸렬택’도 품어냈다. 기회가 될 때마다 후회를 고백했고 어리석음을 인정했다. 지난해 은퇴 투어 논란 때는 먼저 기자회견을 열어 “‘졸렬’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국어사전을 찾아봤다. (2009년 내 모습을 표현하기에) 아주 정확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더라”라고 말하며 웃기도 했다. 아울러 기사 악플을 정독한 소감을 전하며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생각이 대부분이더라”라고 덧붙였다.

박용택의 ‘푸는 방식’은 울림을 준다. 과오가 서린 과거는 고칠 수 없지만, 오명을 둘러싼 문화와 맥락은 끊임없이 변하고, 안티팬들이 만들어낸 조롱의 기호는 스타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일례로, 현역 프로게이머 시절 ‘평생 우승 못 해볼 만년 2인자’라는 악랄한 빈정에 시달렸던 홍진호는 손가락질을 놀이로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2의 아이콘’이 됐다. 이제는 누가 안티 팬이었는지 분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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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나이키 광고 속에서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합창을 지휘하고 있는 코비 브라이언트. 유튜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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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프로농구의 전설 고 코비 브라이언트가 은퇴 의사를 밝혔던 2016년, 나이키가 헌정 광고를 만들었다. 암전된 농구 코트 위 코비의 지휘에 맞춰 안티 팬들이 오티스 레딩의 연가를 개사해 합창한다. “너무 오랫동안 당신을 증오해서 이제 습관이 돼버렸어요.” 월간지 <지큐>(GQ)의 당시 표현을 빌리면 “리그 최고의 빌런(악당)을 잃게 된 이들의 증오”야말로 코비에 대한 최고의 찬가였다.

치열하게 노력하는 승부사일수록 순간순간 졸렬해질 수 있지만, 팬들과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정상급 스타에게는 ‘안티 팬도 팬’이 아니라 ‘안티야말로 팬’일지도 모른다. 박용택은 은퇴식 고별사에서 롯데 팬 스탠드를 향해 사과와 함께 “그 순간 졸렬했을지 몰라도 절대 졸렬한 사람 아니다”라는 마지막 항변을 남겼고 갈채로 응답받았다. ‘졸렬한 타율관리’를 ‘대범한 안티 관리’로 바꿔내면서 그는 ‘졸렬택’과 화해했다.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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