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박은주의 터치! 코리아] '벗을 자유' vs. '안 보고 싶은 권리'

조선일보 박은주 문화부장
원문보기

[박은주의 터치! 코리아] '벗을 자유' vs. '안 보고 싶은 권리'

서울맑음 / -3.9 °
박은주 문화부장

박은주 문화부장

"짧아도 너무 짧다. 나는 아예 허공을 보고 다닌다." "이제 남자들도 반바지 입고 다리털 내놓고 다니며 복수해야 한다." 요즘 여자들 옷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심하면 그런 옷 입지 말라고 얘기해라" 충고했다. 순간 '사람 잡을 소리 한다'는 표정들이다. 여성의 옷차림을 적시해 언급하는 순간, 운 좋으면 '꼴통', 까딱하면 '성희롱 범죄자'로 몰린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요인은 민망함과 두려움이다.

그런데 정말 남자만 스트레스를 받을까. 속옷만 겨우 가린 반바지, 등이 훅 파인 해변용 원피스 여성을 회사 주변에서 마주칠 때면 같은 여성인데도 당혹스럽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물론 말은 못한다. 남의 옷차림을 지적하는 건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다만, 회사에서 신문지 깔고 앉아 양푼에 밥 비벼 먹지 않듯 공적인 공간에서는 공적인 태도 그리고 공적인 옷차림이 있다. 그것도 글로벌 스탠더드다.

문득 '벗을 자유'가 '안 보고 싶은 권리'보다 더 우월한 개념인가 의문이 든다. 동시에 요즘 일부에서 벌어지는 영화 등급 논쟁이 떠올랐다.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뫼비우스'가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 지금 상태론 일반 극장에서는 상영하지 못한다. 감독의 매체 인터뷰와 떠도는 이야기를 추려보면, '아들의 주요 부위를 절단한 어머니, 아들에게 자기 부위를 이식한 아버지,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 장면' 등이 문제인 것 같다.

영화감독이나 제작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제한상영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내리는 이런 결정은 해당 영화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반대로 영등위는 우리나라의 등급제가 결코 빡빡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폭력적인 성 묘사가 있는 '세르비안 필름'이란 영화가 있다. 영국은 '삭제 후 등급 부여', 호주는 '등급 거부', 한국은 '제한상영가' 등급을 줬다는 것이다.

상업 극장에서 상영을 못 한다고, 영화를 절대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세르비안 필름'을 비롯, 성매매·성소수자를 다룬 '줄탁동시' 같은 제한상영가 영화도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동호회 형식으로 상영회를 가질 수도 있다.

결국 '뫼비우스' 논란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상업적으로 상영할 권리'에 대한 다툼이다. 근친상간은 예술의 단골 소재고, 문제는 드러내는 '방식'이다. 영화를 본 등급위원들은 다수결(5대2)을 통해 '국민을 상대로 한 일반 극장의 상영은 불가하다'고 결론 낸 것이다.


"유해성이 있으니 시중 유통은 안 된다"와 "일단 유통권을 달라"는 두 주장만 부딪친다. 뭔가 빠졌다. 관객의 권리다. '그 영화 보고 싶다'는 관객의 요구가 정당하듯, '그런 영화 안 보고 싶다'는 관객도 존중받아야 한다. 상업 극장에서 공개된다는 건 무심코 극장에 갔다가 예상 밖의 표현 수위를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얼마 후 가정집 케이블 TV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거다. '싫으면 안 보면 된다'는 논리는 무책임하다.

문제의 영화를 본 사람은 영화 제작자 측과 등급위원들뿐이다. 소비자는 빠지고, '영화 생산자'가 상영할 자유를 줄까, 말까만 논의된다. 평균 소비자 다수의 의견을 들어보는 건 어떤가. 잠정적 제한상영가 영화에 대해서만은 2차로 '영화 배심원 제도'를 운영해보는 거다. 대학생 딸, 내 남편, 우리 선생님이 동네 극장에서 봐도 괜찮을 영화인지 '상식'에 맡겨 보자. 한쪽 목소리만 들려선 안 된다.

[박은주 문화부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