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든 그립을 쥐던 해리 바든의 1911년 우승 [자료=디오픈] |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올해로 제 149회째를 치르는 가장 오랜 골프 대회 디오픈이 로열세인트조지스에서 15번째로 열린다.
1887년 잉글랜드 남부 켄트 샌드위치 해안에 개장한 이 코스에서 열린 지난 14번의 디오픈은 괴상한 재앙과 불운, 뜻하지 않은 우승에 기괴한 스코어도 쏟아져 나왔다. 두 번 우승한 해리 바든, 월터 하겐을 포함한 12명의 챔피언들도 좀 특이하고 갑작스레 우승컵을 안았다.
처음 개최한 1894년은 스코틀랜드를 벗어나 잉글랜드에서 열린 첫 번째 디오픈이었다(그 이후 50번을 잉글랜드에서 개최했다). 총 94명이 겨룬 결과 존 헨리 테일러의 우승 스코어는 326타로 대회 역사상 가장 높았다. 당시 6월11~12일 이틀간 하루 36홀씩 4라운드로 치러졌는데 테일러는 84-80-81-81타를 쳤다. 해리 바든, 제임스 브레이드와 함께 영국 골프 초창기의 ‘위대한 3인방’으로 불렸다. 3명이 디오픈 16승을 합작했는데 테일러는 5승을 했다.
로열세인트조지스에서 열린 14번의 대회와 우승자. |
1899년과 1911년 디오픈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있는 영국 왕실령 소재의 섬인 저지(Jersey) 출신의 ‘위대한 3인방’인 해리 바든이 잭 화이트를 5타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바든 그립을 창시한 장본인이자 디오픈 통산 최다승(6승)에 빛나는 선수다. 인구가 고작 9만명인 섬 출신의 골퍼로서는 가장 성공한 스타일 것이다. 1899년은 98명이 출전했고, 12년 뒤에는 무려 226명이 출전했다. 바든은 프랑스의 아놀드 마시와 303타 동타로 마치고 연장전 끝에 우승했다.
디오픈 사상 최초의 60타대 스코어는 1904년에 J. H. 테일러가 마지막날 친 68타였다. 이 타수는 이후 25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올해 루이 우스투이젠이 첫날 기록한 6언더파 64타는 이 코스의 18홀 최저타 타이 기록이다. 1904년은 125명이 출전해 이틀간 예선을 치르고 52명까지 컷을 추린 뒤에 3일째 36홀 경기로 변경됐다. 우승은 마지막날 69타를 친 잭 화이트의 296타였다. 제임스 브레이드와 테일러는 3타차로 공동 2위로 마쳤다.
1922년 미국에서 온 첫번째 디오픈 우승자 월터 하겐 [사진=디오픈]. |
1922년은 총 80명의 선수가 출전해서 하루 36홀씩 이틀을 치러 우승컵을 수여했다. 18번 홀에서는 로열싱크포츠에서 열렸던 2년 전 디오픈 우승자인 스코틀랜드의 조지 던컨이 칩샷을 했다가 그린 왼쪽에 떨어졌던 볼이 다시 발치로 구르는 바람에 미국에서 온 월터 하겐이 한 타차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던컨은 ‘홀로우’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부터 6년 뒤인 1928년에 하겐이 다시 우승했다. 1928년 113명이 출전해 이틀 경기후에 공동 51등까지 커트라인을 정했다.
1934년 디오픈에서는 헨리 코튼이 67-65타로 포문을 열었는데, 이걸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 유명한 ‘던롭65’ 골프볼이다. 당시로서는 한 라운드의 역대급 최저타 기록이었다. 처음 두 라운드에서 작성한 코튼의 기록은 이후 58년간 유지되었다.
로열세인트조지스에서 열린 디오픈은 날씨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몇 번은 악천후 속에 열렸다. 1938년 마지막 날은 오픈 역사상 최악으로 손꼽힐 만하다. 행사용 텐트가 찢어지고 무너졌으며, 물건들이 바람에 날려서 바다에 빠졌다. 마지막 날 80타 이하의 스코어를 기록한 선수는 7명에 불과했다. 바람이 어찌나 강했던지 코튼은 370야드 2번 홀에서 드라이버 샷으로 원온에 성공한 뒤 이글 퍼트를 성공시켰다. 알프 패드검도 당시 384야드였던 파4 11번 홀에서 원온으로 이글을 잡았다. 결국 잉글랜드의 렉 윗콤브가 마지막날 78타를 쳤으나 15오버파 295타로 2타차 우승했다.
1949년 우승한 보비 로크가 불운으로 연장전에 나가게 된 브래드쇼와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사진=디오픈] |
1949년 대회에서 5번 홀에서는 해리 브래드쇼의 드라이버 샷이 깨진 병 속으로 굴러들어갔다. 그는 그대로 플레이를 강행해 약 20야드 정도 전진한 후, 더블보기를 기록했다. 호주의 보비 로크는 2언더파 70타를 쳐서 최종합계 5언더파 285타로 브래드쇼와 동타를 이룬 뒤 연장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대에 프랭크 페닉이 코스 리노베이션을 했고, 골프장으로 들어오는 우회도로가 생기면서 디오픈을 주관하는 영국왕립골프협회(R&A)는 32년 만에 1981년 디오픈을 다시 샌드위치로 옮겨 치렀다. 대신 파72가 아닌 파70으로 줄여서 치렀는데 미국의 빌 로저스가 4언더파 276타를 쳐서 독일의 베른하르드 랑거에 4타차 우승했다.
4년 뒤인 1985년에 열린 153명이 출전해 스코틀랜드의 샌디 라일이 2오버파 282타로 미국의 페인 스튜어트를 한 타차, 베른하르드 랑커는 2타차 3위로 제치고 우승했다.
1993년에는 남아공의 어니 엘스가 디오픈 네 라운드에서 모두 60대 타수를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면서 우승을 예상했지만 20분 후에 호주의 ‘백상어’ 그렉 노먼이 64타를 쳐서 사상 최저타인 13언더파 267타로 우승했다. 이 코스에서 열린 디오픈에 두 번 출전해 2, 3위를 한 랑거는 이번에도 3위로 마쳤다. 이후 두 번 더 출전했으나 모두 컷탈락했다.
2003년의 깜짝 우승자 벤 커티스. [사진=디오픈] |
2003년에는 2부 투어 출신으로 메이저 대회로는 첫 출전했고 링크스 코스 경험도 없고, 영국 자체를 처음 방문했던 26세의 무명 벤 커티스가 깜짝 우승했다. 우승 당시 세계 골프 랭킹 396위였다. 2003년에는 예측할 수 없는 바람에 악천후를 만나 타이거 우즈가 첫홀 티샷부터 로스트볼이 되면서 망가져서 우승을 놓치기도 했다. 커티스는 마지막날 11홀 동안 6타를 줄이면서 선두로 치고 나가더니 2언더파 69타를 쳐서 토마스 비욘에 한 타차 우승했다. PGA투어 5년 출전권을 받았지만 커티스는 그 뒤로 예선 탈락을 거듭하다가 40대 초반에 은퇴했고 지금은 오하이오에서 골프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에 더부룩한 수염과 좋은 인상에 큰형의 이미지기는 하지만 메이저 우승 없는 선수로 여겨졌던 북아일랜드 대런 클락이 우승했다. 첫 이틀간 2언더파 68타를 친 클락은 3라운드 69타에 이어 마지막날 이븐파 70타로 필 미켈슨과 더스틴 존슨을 3타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그로써는 16번째 출전한 디오픈에서의 메이저 첫 승이었다.
130여 년 전 처음으로 이 코스에서 열린 대회 우승 상금은 30파운드였다. 화폐가치가 지금과는 비교하기 힘들지만 그렇게 많은 금액은 아니었다. 1928년에 가서야 우승 상금은 100파운드가 된다. 현대 골프에 와서 상금은 급격하게 증액됐다. 그렉 노먼이 10만 파운드를 받고 10년 지나 커티스는 7배를 받았다. 올해는 사상 처음으로 207만 달러가 책정됐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지난해 열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등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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