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를 만나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첫 출전을 시작으로 13년간 국가대표로 그라운드를 누볐던 홍명보. A매치 최다 출전(136경기), 4회 연속 월드컵 출전, 아시아 최초 브론즈볼 수상이라는 기록의 소유자다.
빛나는 선수 시절을 보낸 이후에는 지도자로 변신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그의 축구 인생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JTBC GOLF&SPORTS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위대한 수비수’의 이야기를 담았다”며 ‘마이 히어로 – 홍명보’ 제작 이유를 설명했다.
사진=JTBC GOLF&SPORTS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 축구의 전설, 홍명보가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K리그 감독이다. 홍명보의 또 다른 도전이다.
2020년 12월 24일, 홍명보는 울산현대축구단의 감독으로 선임됐다. 어느덧 K리그 최고령 감독이 된 홍명보. 그가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그의 일상이 최초로 공개된다. 처음 시작한 울산살이에 적응해 나가는 홍명보. 그가 생활하는 개인 공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느새 단골집도 생겼다는데.
2014년 홍명보는 비난 여론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선수 선발 방식을 두고 ‘의리 축구’ 논란이 불거졌다.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귀국하던 당시, 공항에서 엿을 맞기도 했다. 뒤이어 땅 투기와 대표팀 가라오케 회식 논란이 일었다. 쏟아지는 의혹과 비난에 홍명보는 대표팀 감독직에서 퇴임했다.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정작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해명하지 않았던 홍명보. 당시에는 다 말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가 공개된다. 2014년 대표팀에서 뛰었던 구자철과 기성용, 그리고 당시 대표팀에 동행했던 기자들의 증언으로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홍명보와 황선홍, 전설의 ‘H-H'라인이 뭉쳤다. 두 레전드의 첫 방송 동반 출연이다. 홍명보와 황선홍은 1993년부터 당시 포항제철 아톰즈에서 수비와 공격을 담당했다. 두 선수는 환상의 호흡을 맞추며 구단과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1990년 국가대표팀의 막내 시절부터 2002년 은퇴식까지 13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했던 두 선수. 그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아 역대 월드컵 영상을 시청하며 지난 시간을 회고한다. 대표팀 막내 시절 에피소드부터 2002년 스페인전 승부차기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두 레전드의 축구 실력만큼이나 출중한 입담이 펼쳐진다.
사진=JTBC GOLF&SPORTS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1992년부터 당시 포항제철 아톰즈에서 뛰던 홍명보는 1997년에 J리그 ‘벨마레 히라츠카’로 이적했다. 그곳에서 당시 촉망받던 일본 선수 나카타 히데토시와 한 팀이 됐다. 일본 국가대표 선수였던 나카타는 한국인 동료 홍명보를 회상한다. 약 20년 전, J리그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홍명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후 1999년부터 홍명보는 ‘가시와 레이솔’에서 수비수로 뛰었다. 홍명보의 이적 전까지는 중위권에 머물러 있던 가시와 레이솔. 홍명보의 입단 이후 리그 3위로 단숨에 도약했다. J리그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주장을 맡았던 홍명보. 오늘날에도 J리그에선 그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획득, 그 영광의 주인공들이 9년 만에 모였다. 김창수(인천 유나이티드 FC), 김현성(포항 스틸러스), 박종우(부산 아이파크), 오재석(인천 유나이티드 FC)은 한자리에 앉아 그들이 뛰었던 경기 영상을 시청하며 변함없는 ‘원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재석이 회상하는 홍명보 감독의 미팅 시간. 당시 대표팀은 동메달 결정전인 한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 모든 선수를 각성시켰던 홍명보 감독의 짧고 강렬한 한마디가 있었다. 일본을 상대로 2-0 완승을 끌어낸 한마디, 과연 어떤 말이었을까?
9년이 지난 시간에도 선수들이 잊지 못하는 홍 감독의 어록이 있다. 항상 가슴 속에 ‘칼’을 품고 다닌다는 홍명보. 그 말뜻은, 그 안에 담긴 홍명보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2012 런던의 ‘황금 세대’가 기억하는 그 날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홍명보는 대학교 4학년에 올라가던 1990년에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그리고 4년 뒤, 미국 월드컵에서 2골을 기록하며 스타덤에 오른다. 공격에도 자유롭게 가담해 골 득점에 기여하는, ‘한국에 없던 수비수’였다.
그랬던 그가 축구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던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리베로의 탄생까지는 남몰래 삼켜야만 했던 어려움이 있었다. 홍명보가 축구를 포기할 뻔했던 사연은 과연 무엇일까?
[박찬형 MK스포츠 기자]
[ⓒ MK스포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