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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수사팀장의 비화 “마지막이라 생각, 조주빈에 70만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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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6일 오후 2시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물을 공유하고 판매하는 ‘박사방’ 수사팀을 이끌던 유나겸 사이버성폭력 수사팀장(경감)은 팀원들과 큰 결심을 했다. 일명 ‘박사’로 불린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에게 돈을 주고 단톡방에 들어가 위장 수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조선일보

박사방 수사팀을 이끈 서울지방경찰청 유나겸 경감이 공개한 박사와의 텔레그램 대화


수사팀은 조주빈에게 가상 화폐로 10만원을 보내고 단톡방 ‘노아의 방주’에 들어갔다. 방엔 17명이 있었다. 그런데 조주빈은 아동 성 착취 영상을 올리더니 “당장 다른 방에 유포하라”는 예상치 못한 요구를 했다. ‘프락치나 형사, 기자'를 골라내겠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유포 인증 사진을 속속 올렸다. 조주빈은 유포를 망설이는 참가자는 강퇴(강제퇴장) 시켰다. 유 팀장은 담당 검사에게 전화로 상의했다. 하지만 검사는 “아무리 수사를 위해서라도 이런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수사팀은 영상을 유포하지 않았고, 해당 방은 삭제됐다. 10만원은 떼이고, 단서는 못 잡은 채 피해자는 늘어갔다.

한 달쯤 후 유 팀장은 다시 위장 수사에 나섰다. 조주빈은 “70만원을 내면 성 착취물이 많은 ‘위커방’에 들어가게 해주겠다. 신분 인증이나 영상물 유포는 안 시킬 테니 마음 놓고 들어오라”고 홍보했다. 유 팀장은 ‘이번엔 반드시 검거한다'는 생각으로 가상 화폐 70만원어치를 송금했다. 조주빈은 우선 ‘샘플방’ 주소를 줬는데, 수사팀은 거기서 성 착취물 수백 개를 증거로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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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방 수사팀을 이끈 서울지방경찰청 유나겸 경감이 공개한 박사와의 텔레그램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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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주빈은 약속을 뒤집고 ‘신분증’을 요구했다. 당황한 수사팀이 ‘딴 방법이 없느냐’며 시간을 끌자 ‘가라(가짜) 보내면 차단한다’ ‘얼굴, 생년월일까지 나와야 된다’고 했다. 유 팀장은 급하게 지인에게 부탁해 신분증을 보냈다. 그랬더니 조주빈은 이번엔 “새끼손가락을 들고 얼굴이 나오게 셀카(셀프 카메라)를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여기까지 겨우 왔는데, 포기할 순 없었다. 유 팀장은 지인을 설득해 셀카를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조주빈은 위커방엔 들여보내 주지 않고 돈만 추가로 요구했다.

수사팀은 이후 두 달간 추가로 수사를 계속한 끝에 조주빈을 검거했다. 조주빈은 작년 11월 1심에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다.

유 팀장의 이런 ‘박사방 사건 위장 수사 비화‘는 31일 국회 권인순 의원실과 주최하고 여성가족부·경찰청이 공동 주관한 ‘아동·청소년성보호법 개정 성과와 과제’ 세미나에서 처음 공개됐다. 최근 아동성보호법이 개정돼 경찰이 디지털 아동 성범죄 수사를 할 땐 신분 위장을 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생겼다. 유 팀장은 “지금 다시 박사방 수사를 한다면 그때처럼 우왕좌왕 고민하지 않고 가상 인물의 신분증과 셀카를 보내고 당당히 유료방에 들어갔을 것”이라며 “앞으로는 성인에 대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해서도 위장 수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기길 바란다”고 했다.

[김연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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