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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 (수)

이슈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삼성 상속세 대신 미술품 낸다? 감정업계는 벌써 ‘주도권 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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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물납제,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한겨레

10여년 전부터 단편적으로 논의됐던 미술품 물납제 논의는 지난 연말 시작된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컬렉션 평가 작업을 계기로 올 상반기 문화계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건물과 그 앞에 설치된 알렉산더 콜더의 채색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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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요. 이건희 회장 미술품은 우리가 제일 많이 감정하고 평가했어요.”

지난 3일 낮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3층의 2021 화랑미술제 개막 전시장. 현장 부스에서 기자를 불러세운 한국화랑협회의 한 간부는 휴대전화를 내밀어 화면의 문자를 보여주면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최근 미술계에서 이슈가 된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미술품 컬렉션 감정평가 작업을 세 개의 주요 미술품 사설 감정기관들이 분담한 현황이 기록되어 있었다. 1만점 넘는 컬렉션 가운데 해외 미술품과 한국 근현대화 작품은 화랑협회와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각각 감정했고 골동품·고서적·고서화는 화랑협회와 미술시가감정협회,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가 나눠 맡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간부는 “전체적으로 그림에 관한 것은 화랑협회가 모두 다 도맡았다. 삼성가에서 우리를 가장 많이 신뢰한다는 얘기”라며 “그런데도 일부 다른 단체에서 자기들이 제일 많이 감정했다는 헛정보를 퍼뜨린다. 언론이 잘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관계자는 <한겨레>에 전혀 다른 말을 전했다. 그는 화랑협회 간부의 말을 두고 ‘터무니없는 발언’이라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1만3000여점에 달하는 전체 작품을 감정한 것은 우리 기관이고, 다른 두 협회는 영역을 나눠 6500여점씩 감정한 것으로 안다”며 “전체 컬렉션을 제대로 살피고 총합한 것은 센터가 유일하다”는 주장을 폈다. 2021년 새봄, 컬렉터들이 몰려들며 활기를 찾기 시작한 한국 미술시장에서는 한국 미술품 감정의 대표 기관이라고 자처하는 두 단체 사람들이 이건희 컬렉션을 서로 더 많이 평가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역량을 과시하는 기묘한 신경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이 신경전의 배경에는 지난달부터 문화판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술품·문화재 물납제’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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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21~2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케이옥션 사옥에서 경매를 앞두고 사전 공개됐던 당시 간송 컬렉션 소장 불상 2점 모습. 간송 소장품의 상업경매 출품과 뒤이은 유찰은 문화계에 충격을 던지며 가라앉았던 물납제 논의의 물꼬를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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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 불상이 물꼬 트고 이건희 컬렉션이 불붙이고


지난해 간송 전형필 후손들이 세금 문제로 컬렉션 불상을 경매에 내놓으면서 시작한 미술품 물납제 논의가 최근 미술계를 넘어 문화계 전체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화랑가 사람들은 누구나 이 이야기를 꺼내고 상당수 언론도 관련 논의를 연일 속보식으로 보도하는 양상이다. 물납제는 작가나 기업가, 부자 등이 지닌 개인 컬렉션 작품들을 세금 대신 국가에 내는 제도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은 부동산과 유가증권에 국한해 세금 대납을 허용하고 있는데, 감정평가 시스템을 만들어 그 대상을 문화재와 미술품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이다.

물납제 도입에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미술시장의 화랑업자와 감정업자들은 양질의 컬렉션이 국외로 유출되는 걸 막고 국가 차원의 공공 컬렉션으로 만들어 국민의 문화 향유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달 초 화랑미술제를 계기로 서명운동까지 벌이는 중이다. 지난 11일엔 코로나 상황인데도 100명 넘는 취재진과 미술계 인사, 일반 시민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물납제 도입을 위한 학계와 업자들의 세미나도 열었다. 지난해 1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물납제 관련 정책 발제와 토론회를 진행하며 화두를 꺼낼 때만 해도 미술시장의 관심은 냉랭했다. 하지만 새해 초 이건희 컬렉션의 근황이 알려지면서 삽시간에 문화판을 차지하는 중요 이슈로 급부상했다.

물납제 논의는 2011~2012년 문체부에서 원로 유명작가들 타계 시 유족들에게 상속세 부담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유작의 물납 방안에 대한 정책 연구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 등 세제당국과의 이견이 생겨 본격적으로 논의가 진척되지는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간송의 유족들이 간송 컬렉션 승계 과정에서 세금 부담으로 불상 2점을 상업경매에 출품한 것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면서 물납제가 재론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수장가 손창근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보관해온 추사 김정희의 최고 명품 그림인 <세한도>를 조건 없이 전격 기증하고 대대적인 기념전시를 한 것이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면서 물납제 논의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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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물납제 도입과 관련해 주된 논의 대상으로 떠오른 초고가 미술품들. 리움이 소장한 추상표현주의 거장 마크 로스코의 대작 <무제>(1956).


■ 일정상 이건희 컬렉션에는 적용 어려워


특히 이 전 회장의 유산에 대한 상속세 납부를 앞두고 매각 가능성을 염두에 둔 초고가 미술품 컬렉션 감정평가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외로 유출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명분론이 화랑협회를 중심으로 미술시장 일각에서 일어나자 물납제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한국미술협회, 화랑협회는 물론 한국예총과 민예총, 한국박물관협회 등 미술판의 주요 단체들과 전직 문체부 장관들까지 나서 물납제 도입 제도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지난 3일 공동 발표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삼성가 컬렉션 평가와 물납제는 관계가 없다. 물납제는 지난해 11월 이광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화랑가 쪽 의견을 수렴해 입법을 목표로 발의하긴 했지만, 아직 국회 차원에서 본격적인 논의도 시작되지 않았고, 국민과 정치권 여론도 폭넓게 수렴해야 한다. 양질의 물납 작품을 선별하기 위한 시스템 정비와 제도화 작업도 이제 걸음마 단계여서 입법한다 해도 최소한 1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기재부의 주무부서인 재산세과 관계자는 “현재 미술계의 물납제 관련 논의를 신중하게 지켜보고 있다. 취지는 알겠지만 세금 내지 않고 문화자산으로 활용한다는 의미와 실제 가치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반면 삼성은 다음달까지 소장품 컬렉션의 매각, 소장, 기증 등 처리 방안을 확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실적 여건상 삼성가 쪽이 자신들의 컬렉션을 상속세 대신 물납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는 게 삼성 컬렉션을 잘 아는 이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삼성가 내부에서도 뜨악하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의 윤용철 대표는 “삼성의 컬렉션과 직접 관계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지만, 물납제 법제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국면의 관심사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화랑협회나 미술품감정연구센터 쪽은 한발 더 나아가 물납제가 통과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감정평가 기관으로 공인받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이들은 다음달부터 감정을 위한 전문인력 양성 아카데미와 세미나 등을 열면서 다가올 물납제 제도화 후속 작업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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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컬렉터 손창근씨의 기증을 기념해 14년 만에 전모가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의 전시 모습. <세한도>의 기증 전시는 문화유산의 국외 유출을 막고 공공 문화자산으로 국민이 공유하자는 취지의 물납제 관련 논의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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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올인’하나? 시장의 덩치와 격이 달라진다


미술시장 업자들이 이건희 컬렉션의 감정평가 작업을 업고 물납제 관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철저히 전략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막대한 감정 이권을 노린 민간 업체들끼리의 주도권 싸움이 배경에 깔려 있고, 향후 물납이 허용될 경우 시장의 규모가 훨씬 커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기 때문이다.

물납제가 시행되면 재벌 컬렉션은 물론 재력가, 유명 작가 등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상속세 등 세금 관련 대납을 위해 막대한 작품 평가·감정 수요가 생겨날 것이 확실하다. 특히 지금까지의 개인 취향 위주 컬렉션에서, 상속을 염두에 두고 미술관 공간과 성격에 맞는 대작이나 대형 명품 위주의 뮤지엄 컬렉션으로 시장의 축이 이동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술시장의 한 중견 딜러는 “국외 미술품의 초강세로 국내 작가들의 거래로는 시장 역동성을 잃은 지 오래인 화랑업체나 좀 더 시장 규모를 키우고 싶은 경매업계로서는 물납제가 시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라고 분석했다. 감정평가 사업으로 상당한 이익은 물론 막대한 시장이 추가로 확보되는 것이기에 이건희 컬렉션 문제를 거론하면서 집요하게 도입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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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손창근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추사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의 앞쪽 표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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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감정’이 관건…​유산 보존 대의 지켜야


물납제의 관건은 투명하고 객관적인 감정 시스템이다. 유명 작가나 대가들의 컬렉션을 시장에 매각하지 않고 물납으로 공공화하자는 취지는 나무랄 데 없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장의 감정 능력이 그동안 숱한 진위 논란이나 가격 산정을 둘러싼 추문으로 실추된 전례가 많고 일부 화랑업자들 또한 재벌 비자금의 집사 구실을 해온 전력이 있어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감정평가를 행할 전문가층이 얇은데다, 현재 감정업무를 맡고 있는 화랑가 쪽 관련 전문가들이 서로 패를 갈라 단체를 따로 만들고 상대방을 비난하며 암투를 벌이는 현재 상황도 불신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문화재위원회처럼 국가 주도의 감정기구를 만들 것인지, 미술업계 자율적인 공인 감정기관 경쟁 체제로 갈 것인지를 놓고 여러 이견이 나오지만 틀 잡힌 방향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문체부의 한 관계자는 “시장업자들과 함께 물납제 제도화를 논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문화유산의 국외 유출 방지와 국민이 공유하는 공공유산화라는 물납제의 원래 대의를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감정평가 등의 향후 논의를 집중하는 지혜가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삼성미술관 리움, 한국화랑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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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열린 ‘문화재·미술품 물납제 도입에 관한 세미나’ 행사 모습. 한국고미술협회, 한국미술협회, 한국화랑협회가 공동 주최한 이날 세미나에서는 미술시장과 학계 관계자들이 나와 물납제 도입의 필요성과 선결적 요건에 대한 발제와 토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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