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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연재] OSEN '홍윤표의 휘뚜루 마뚜루'

[홍윤표의 휘뚜루 마뚜루] 최형우에게 묻는다,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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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

못내 아쉽다. 당당하게 기록 도전에 나섰으면 좋았을걸, 최형우(37. KIA 타이거즈)는 끝내 그러지 않았다.

삼성 라이온즈에 몸담고 있던 시절인 2016년, 최형우는 3할7푼6리의 고타율로 첫 타격왕에 올랐다. 그 후 KIA로 보금자리를 옮긴 최형우는 ‘모범적인 FA 사례’로 인정받으면서 4년만인 올해 김현수(2008년 두산 베어스, 2018년 LG 트윈스)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두 구단에서 타격왕을 차지하는 영예를 누렸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남들은 평생 한 번 하기도 어려운 타격왕 타이틀을 두 번이나 품에 안았으니 칭찬받아 마땅한 노릇이겠지만, 타격왕 경쟁자였던 손아섭(32. 롯데 자이언츠)을 의식해 마지막 게임(10월 31일 NC 다이노스)에 출장치 않음으로써 ‘떳떳하지 못한 타격왕’의 비난을 뒤집어쓴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마치 박용택(41. LG)이 남긴 굉장한 업적(19시즌 동안 LG 한 구단에서 KBO리그 최다인 개인통산 2236경기에 출장, 리그 최초 2500안타 고지 등정, 2504안타로 마감)에도 불구하고 2009년 타격왕에 오를 당시 뒤쫓고 있던 홍성흔(당시 두산)을 밀어내기 위해 동료 투수들이 고의 볼넷을 남발하고 마지막 한 경기를 벤치에 앉아 지켜본 것과 마찬가지다. 올해를 끝으로 은퇴한 박용택의 프로야구 생애에 그 장면은 두고두고 입길에 오르내리는 ‘옥에 티’로 남아 있다.

최형우나 박용택이 온 힘을 쏟아부어 타이틀을 차지한 과정의 노력과 땀은 폄하 받을 까닭이 전혀 없다. 다만 타격왕에 오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면 비겁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감독의 배려와 관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 그래서 그들에게만 온전히 비판하는 것에 대해 당사자는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이와 관련해 KIA 구단 관계자는 “타율 관리를 위해 제외한것은 아니다. 전날 사실상 타격 1위로 정해졌고, 윌리엄스 감독이 마지막 경기는 젊은 선수 위주로 가겠다는 방침을 정해서 빠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소속 선수의 타이틀 관리라면 OB(두산 전신), 삼성, 빙그레(한화 전신) 감독을 역임했던 김영덕 전 감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영덕 전 감독만큼 선수들이 타이틀을 따내는데 직접적인 배려와 관리를 해준 이는 없었다.

타격 타이틀로만 국한해서 보면, 1984년 이만수(삼성)의 타격 3관왕(타율, 홈런, 타점) 만들기, 1989년 고원부와 1991년 이정훈(이상 빙그레)의 타격왕 만들기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이만수 때는 경쟁자였던 홍문종(롯데 자이언츠)을 9연타석 고의볼넷 출루시키기로 타격왕을 성사시켰고, 고원부 때는 김영덕 감독이 덕아웃에서 계산기까지 두들겨가며 기어코 타격왕을 만들어줬다. 이정훈 역시 경쟁자였던 장효조(당시 롯데)를 고의볼넷으로 내보내는 수법으로 1리 차(이정훈 .348, 장효조 .347)로 따돌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제 와 구태여 제자 사랑이 지극했던 김영덕 전 감독을 훼예포폄하고 싶지는 않다. 김영덕 전 감독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그 같은 타이틀 만들기는 그의 강한 소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회고는 1987년 3월 20일부터 4월 2일까지 <일간스포츠>에 ‘김영덕 나의 프로야구’라는 타이틀을 달고 연재됐다.

그의 1984년 ‘이만수 3관왕 만들기’(1987년 3월 28일치 연재분)의 회고를 되짚어보자.

“1984년에 쏟아진 비난에는 져주기, 한국시리즈 패배와 함께 이만수를 타격 3관왕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포함돼 있다. 당시 1백 게임 중 81게임을 치른 8월 26일 현재(……) 이미 이만수는 3백31타석을 기록해 규정타석(3백10)을 채워놓고 있었다. 이만수가 타율 선두를 지켜 3관왕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검토가 시작됐다.”

그 검토의 결론은 “타율은 다소 관리를 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홈런과 타점은 2위 추격자와 거리가 있어 안심할 수 있지만 타율은 그렇지 못했다.

김영덕 전 감독은 “나는 프로야구는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남는 것은 기록이다. 10년 후 또는 그 이후 한국프로야구의 최초 타격 3관왕은 이만수였고, 당시 성적은 어땠다는 것은 분명 기록으로 남는다. 반면 그때 이만수가 막판 7게임을 타석에 나오지 않았고 홍문종에게는 9타석 연속 볼넷을 내준 결과였다고는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또 설혹 기록된다 해도 3관왕의 명예는 크게 퇴색되지 않는다고 봤다”고 강변했다.

삼성은 주전 포수 이만수를 벤치에 앉혀두는 바람에 (장기간 결장으로 경기 리듬이 흐트러져 수비에 허점이 생겨)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에 뼈아픈 우승을 넘겨줬다. 그 얘기는 김영덕 전 감독이 시리즈 패배의 원인으로 언급한 자못 이색적인 내용이다. 뒤집어보면, 이만수의 3관왕 만들기로 인해 ‘게는 잡았으나 구럭을 놓친 셈’이 된 것이다.

그는 “그때 이만수를 정상 출전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없지 않다. 장담은 못 해도 자력으로 3관왕을 달성했을 것이다. 이만수는 그 기간 동안 계속 뛰고 싶다고 얘기했다. 말린 것은 나였다. 선수란 감독이 내보내지 않으면 뛸 수 없다”고 털어놓기까지 했다.

그의 말대로 이만수의 KBO리그 최초 타격 3관왕은 역사의 한 장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와 동시에 그 영예로운 기록 뒤에 꼬리표처럼 ‘만들어준 3관왕’의 오점도 붙어있다. 그런 ‘사실’이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에는 지워질지 모르겠지만 한국야구사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형우가 이만수나 박용택이 걸었던 길을 답습한 것은 다시 생각해봐도 아쉬울 따름이다. 왜 우리 타자들은 ‘떳떳한 왕관’을 외면하는가. 비판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고 기록은 영원한가.

글/ 홍윤표 OSEN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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