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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느림의 미학’의 상징이었다. 기껏해야 130km 초, 중반대의 느림보 공은 프로야구 투수로서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기개는 펄펄 살아있었다.
유들유들한, 짐짓 여유로운 투구 자세는 상대 타자들의 속을 뒤집어놓았고, 내외곽의 스트라이크존을 건드리는 정교한 제구력에 속절없이 헛손질하고 돌아서는 타자들의 얼굴을 붉히게 했다. 그랬던 그가, 아니 그의 공이 언제부터인가 비실대기 시작했다. 그의 투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게 했다. 자로 잰 듯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밋밋해진, 심한 표현으로 비척대는 공이 가운데로 몰렸고, 타자들의 배트에 쉽사리 걸려들었다.
그의 그간의 노력과 팀에 대한 공헌에 늘 고마워했던 감독도 더는 버티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더군다나, 매 게임이 가을 무대 진출의 끈이 걸린 터여서 마냥 지켜보기에는 팀 사정이 너무 절박했다. 10월 2일, 그는 1군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는, 두산 베어스의 유희관(34)이다. 올해 그의 기록은 24게임에 등판, 8승 11패, 평균자책점 5.39다. 평균자책점은 KBO리그는 물론 팀 내에서도 바닥권이다. 무엇보다 2013년부터 시작된 7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 행진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승수보다 패수가 많은) 적자구조다. 승률이 5할도 안 된다는 것은 곧 팀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는 뜻이다.
유희관은 그의 야구 인생길에서 2013년에 10승 7패로 깜짝 솟구친 이후 꾸준히 두산 마운드 선발 한 축을 담당하며 3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공헌했다. 유희관은 2015년에는 무려 18승 5패(다승 2위)를 수확하며 위력을 과시했다. 그해를 정점으로 유희관은 2018년에는 반타작(10승 10패)에 그쳤고, 급기야 올해는 뚜렷한 하향 세를 보였다.
김태형 두산 감독으로선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이용찬의 부상 때문에 돌려막기식으로 어렵사리 선발 마운드를 꾸려왔지만, 계속 유희관을 믿고 선발 한 축을 맡기기에는 시즌 막판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판단을 했겠다. 요행을 바라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던 탓이다.
빠른 공 투수가 아니면 행세하기 어려운 프로야구판에서 유희관은 단연 이색적인 존재였다. 단순한 화제의 인물을 넘어서 그의 ‘느림의 미학’은 엄연한 풍조의 한 가닥으로 자리 잡기까지 했다. 그의 고단한 노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성과의 계량화가 불가피한 프로의 세계에서 이제 그는 자칫 계륵과 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처지가 됐다.
유희관의 느린 공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당사자나 팀으로서는 괴로운 노릇이다. 그렇다고 유희관이 투수로서 유의미한 생명력이 끝났다고 단정 짓는 것은 잔인하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기형도 시인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에서 부분 인용
유희관은 두산 야구팬들에게 '흘러 가버린 기쁨'을 되찾아줄 수 있을까.
글/ 홍윤표 OSEN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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