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규 HDC 회장의 아시아나항공(020560)인수 계획이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현대그룹 계열분리 과정에서 현대차를 사촌 정몽구 회장에게 내줘야 했던 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통해 사세 확장과 신규사업 진출, 그리고 모빌리티에 대한 꿈을 이루고자 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꼬여버린 것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정 회장이 인수하고 싶은 갈망을 최대한 억누른 채 아시아나 인수 절차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이 지난해 11월 아시아나항공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HDC현대산업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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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HDC현대산업개발(294870)의 입장문을 두고 여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HDC현산은 "인수 의지에는 변함이 없다"면서도 아시아나항공의 재무 상태 악화에 대해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코로나 사태와 별도로 아시아나항공의 불투명한 재무제표, 독자적인 경영 판단(계열사 지원) 등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산업은행에 인수 조건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재계에서는 HDC현산의 이번 결정이 ‘산업은행으로부터 유리한 인수조건을 얻어내기 위해 강수를 두었다’는 관측과 ‘사실상 인수 포기 의사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옵니다. 후자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이유는 예상보다 아시아나의 재무상태가 심각했고, FI(재무 투자자)로 나선 미래에셋마저 코로나로 자금 사정이 악화했기 때문입니다. HDC와 미래에셋 입장에서는 인수 가격을 추가로 깎아주는 선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만큼 딜이 깨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을 넘겨받은 산은은 "HDC의 요구사항이 어떤 것인지 파악 중이며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만 말했습니다.
사실 정 회장 입장에선 아시아나항공이 사업 확장 과정에서 꼭 필요했습니다. 지난 2015년 호텔신라와 손잡고 진출한 면세점 사업이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난항을 겪을 당시 기내 면세점 등에 관심을 가졌다는 후문입니다. 기내면세점은 임대료와 인건비 등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아 ‘알짜 수익원’으로 통합니다. 아울러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한다면 본업인 건설을 넘어 관광 및 리조트, 항공 등 사업 영토까지 넓혀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정 회장에게 ‘모빌리티 사업’이 특별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의 선친인 고(故) 정세영 현대차 회장은 1967년 현대차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현대차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당시 현대차 주력 모델이었던 ‘포니’에서 이름을 딴 ‘포니 정’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죠. 아들 정몽규 회장 역시 ‘포니 정 주니어’로 불리며 1996년부터 현대차 회장직을 물려받았습니다.
1997년 출시된 아토스. /현대차 |
하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습니다. 부임 이듬해인 1997년 대우차의 ‘티코’를 상대하기 위해 800㏄급 경차 ‘아토스’를 야심작으로 출시했는데, 차체는 작은데 차고만 높다는 이유로 소비자들이 커브 돌 때 불안하다는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사실 이 디자인은 그가 디자이너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차의 높이를 키우라고 지시한 결과였습니다. 현대차에서 광고를 통해 결점을 보완하려 했으나 1998년 대우가 마티즈를 출시하면서 판매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아토스의 디자인부터 가격 책정까지 꼼꼼히 관여했던 정몽규 회장은 고배를 마셔야했죠.
설상가상 1999년 3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장자인 정몽구 회장에게 현대자동차 경영권을 승계하기로 결정하면서 정몽규 회장은 현대산업개발로 자리를 옮겨야 했습니다. 당시 정몽규 회장은 선친이 반석에 올려놓은 현대차를 떠나기 싫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몽규 회장의 경영 능력은 현대산업개발로 옮긴 뒤 빛을 발했습니다. 강남 스타타워, 삼성동 아이파크, 용산역사 개발 등 사업 당시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됐던 대규모 프로젝트를 연달아 성공하면서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현대산업개발도 자산 10조원이 넘는 10대 건설 업체로 성장했습니다. 현대차 회장 당시엔 ‘물려받은 2세’ 이미지였지만, 현대산업개발로 옮겨온 뒤엔 명실상부 ‘건설맨’으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이파크삼성 전경. /다음 로드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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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회장은 건설업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합병(M&A)은 그런 정 회장에게 좋은 기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금호산업은 지난해 7월 아시아나항공 매각 공고를 냈는데, 같은 해 11월 2조5000억원을 제시한 HDC현산이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습니다. 박현주 회장의 미래에셋그룹이 5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한배를 탔습니다.
정 회장은 기쁜 마음에 기자회견까지 자진해서 열고,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통해 ‘모빌리티’ 그룹으로 도약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정 회장은 ‘모빌리티’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플라잉카(flying car·하늘을 나는 차) 등 공중 운송서비스업 진출을 모색하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당시 강력한 인수 라이벌이었던 애경그룹보다 1조원이나 높은 가격을 제시한 것도 그만큼 그의 의지가 강했던 근거로 꼽힙니다.
하지만 인수 과정은 정 회장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아시아나항공의 재무 상태가 좋지 않은데, 코로나 사태까지 터지면서 항공업계 전망이 불투명해진 것입니다. 사세 확장을 노리다가 자칫 HDC그룹까지 휘청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입니다.
결국 정몽규 회장이 아시아나에서 발을 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재계의 중론입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제 와서 산업은행에 인수를 재검토하자고 할 리는 없고, 에둘러 인수가 힘들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 아니냐"고 분석했습니다. 임원급의 또다른 재계 관계자는 "아시아나 인수에 여러 목적이 있었겠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이번 인수는 실패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HDC 임직원들에 따르면 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고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기업가로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번 입장문을 보면 발을 뺄 수밖에 없었던 명분이 군데 군데 담겨져 있습니다. 코로나19라는 희대의 사태 때문에 여론도 나쁘지 않습니다. 사내 임직원 사이에서는 정 회장의 이번 결정에 대해 "정 회장의 기업가 마인드가 확실하고 주변 참모들과 소통이 원활한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김우영 기자(young@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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