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서 걸프의 섬까지
“출발부터 징조가 이상했다. 광적인 매도 주문이 밤새 쏟아졌다. 아침이 되자 누구든 피바다가 펼쳐진 걸 볼 수 있었다. 오전 7시, 이미 유가는 28%나 떨어진 상태였다. 같은 시각 중국 선전에서는 가진 돈을 선물 투자상품에 쏟아부은 20대 커플이 저축한 돈 절반이 날아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들과 텍사스 채굴꾼들, 러시아 올리가르히들도 공포에 떨며 마이너스 37.63달러라는 가격을 지켜봤을 것이다.”
■ NYMEX를 뒤흔든 20분
러 우랄스, 뉴욕 거래소 공략
2007년 계약…거래는 0건
우크라이나 문제로 제재 중
미국 블룸버그통신이 지난 25일(현지시간) ‘시장 역사상 가장 이상했던 20분’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다. 20일 벌어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마이너스 충격’ 진원지는 뉴욕상업거래소(NYMEX)였으나 블룸버그가 쓴 대로 세계가 그 시장에 이어져 있었다.
NYMEX는 영국 런던의 인터컨티넨탈 익스체인지(ICE)와 함께 석유 선물거래가 이뤄지는 양대 시장이다. ICE에서 팔리는 브렌트유는 이례적으로 유로나 영국 파운드화가 아닌 달러로 거래된다. 원래 런던 국제석유거래소에서 거래되다 2005년부터 ICE 온라인거래시스템으로 넘어갔다.
거래소 상품목록에도 국제정치가 작동한다. 러시아는 우랄스를 뉴욕 거래소에 집어넣으려고 공을 들였다. 2007년 마침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과 뉴욕시장이 NYMEX에 러시아산 석유를 거래품목으로 넣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실제 거래가 이뤄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랄스는 ‘크렘린의 돈줄’로 불리는 가스프롬의 자회사인 가스프롬네프트와 석유회사 로스네프트, 루코일 등이 생산한다. 이 기업들은 2014년부터는 우크라이나 문제로 미국의 제재까지 받고 있다.
■ 두바이가 오만과 손잡은 이유는
두바이, 오만과 원유 협정
수출항 지리적 위치 이점
‘호르무즈 리스크’ 영향권 밖
중동 석유 거래의 중심지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두바이다. 두바이는 뉴욕과 런던에 버금가는 시장을 열어 아시아권 벤치마크를 만들겠다며 2007년 두바이상업거래소(DME)에서 석유 선물거래를 시작했다. 계산은 적중했다. WTI와 브렌트 중심이던 선물시장에서 두바이유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중동 역내 산유국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한 것이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열쇠는 두바이 옆 오만이 쥐고 있었다. 두바이는 선물거래를 개시하면서 오만과 협정을 맺고 오만 원유를 두바이 거래소에 집어넣었다. 오만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 아니다. 즉 사우디가 정해주는 생산쿼터에 구애받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지리적 위치다. 사우디나 두바이에서 유조선들이 인도양으로 나가려면 이란 옆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오만 무스카트의 수출항은 호르무즈 바깥에 있다. 이란과 아랍 간 긴장이 고조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석유 매장량 세계 4위, 천연가스 매장량 3위인 자원부국임에도 오랫동안 고립돼온 이란은 독자적인 거래소를 만들었다. 키시라는 걸프의 작은 섬에 2008년 석유거래소 문을 열었다. 하지만 달러로 거래할 수 없어 외국 자본을 불러들이지 못했다. 올 1월 의회가 예산을 끊으면서 국제거래소를 만들려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 거래망 움직이는 ‘시카고의 힘’
뉴욕이든, 런던이든, 두바이든 선물거래 시스템 뒤에는 미국 기업이 있다. 시카고상업거래소를 운영하는 CME그룹과 뉴욕증권거래소를 소유한 ICE가 이 거래소들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시카고상업거래소는 1848년 설립돼 172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72년 세계 최초로 금융 선물상품을 상장했고 1992년에는 역시 세계 최초로 24시간 전자거래 플랫폼인 글로벡스를 만들었다. 2007년에는 시카고상품거래소와 합병해 CME그룹으로 통합됐다. S&P·다우존스지수 등의 지분도 갖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은 49억달러였다. 이코노미스트는 CME를 “사람들이 모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래망”이라고 불렀다. 두바이 석유 선물도 CME의 글로벡스를 통해 거래된다.
런던의 상업거래소를 운영하는 ICE는 뉴욕증권거래소를 소유한 회사다. 본사는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있으며 미국, 유럽, 캐나다, 싱가포르 등 12곳에 금융·상품거래소를 두고 있다.
<시리즈 끝>
구정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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