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로 지정예고된 ‘최광지 홍패’. 1389년(고려 창왕 1년) 전체 32명 중 6등으로 합격했다는 ‘과거 합격증’이다. |문화재청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성균생원 최광지 병과 제3인으로 급제함.’ 고려시대 급제자 32명 중 6등의 과거합격증은 어떤 모습일까. 문화재청은 630년 전인 1389년(고려 창왕 1년) 발급된 고려시대 과거합격증인 홍패 1점 등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고 3일 밝혔다.
‘최광지 홍패(崔匡之 紅牌)’는 여말선초에 활약한 문신 최광지가 1389년(고려 창왕 1년) 문과 ‘병과 제3인(丙科 第三人)’으로 급제하여 받은 문서이다. 을과·병과·동진사 등으로 구분된 고려시대 문과 등제 구분 중 ‘병과 3등’에 속하는 성적표이기도 하다.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소장된 <등과록전편>에 따르면 1389년 과거에서 합격한 전체 32명의 성적은 을과 3인, 병과 7인, 동진사 22인 등이었다. 이때 조선조 개국 초기 지신사(도승지)와 대사헌,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김여지(1370~1425)가 을과 제1인, 즉 장원급제했고, 최광지는 병과 제3인, 즉 전체 순위 6등에 해당되는 성적을 거뒀다.
‘최광지 홍패’에는 ‘고려국왕지인’이라는 국새가 찍혀있다. 현전하는 다른 고려시대 홍패와 달리 왕명을 직접 실천한 공식문서로서 완결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문화재청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생몰년 미상인 최광지는 전북 부안에 집성촌을 둔 전주 최씨 가문의 인물이다. 1389년 문과에 급제했다는 기록만 있다. 최광지를 비롯한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했는데, 바로 밑동생인 최직지는 형(최광지)이 급제한 1389년 과거에서 동지사 제11인(전체 21등)의 성적으로 함께 입격했다. 최광지의 나머지 두 동생인 최득지(1379~1455)와 최덕지도 훗날 생원·진사시(최득지)와 문과(최득지·1405년 조선 태종)에 나란히 합격한다. 문무과 과거합격증을 홍패라 한 이유가 있디. 보통 홍화씨 등으로 붉게 염색한 종이로 발급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의 1차 시험에 해당되는 생원·진사시험 통과자에게는 합격증이 흰 종이로 발급되었기 때문에 ‘백패(白牌)’라 했다.
현전하는 고려시대 홍패. 그러나 이 6점에는 ‘최광지 홍패’와 달리 해당 관청에서 왕명을 대신해 발급했기 때문에 국왕의 직인이 없다.|박성호의 논문에서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현전하는 고려시대 홍패는 ‘장양수 홍패’(국보 제181호)를 비롯해 총 6점이다. 시기 또한 모두 ‘최광지 홍패’ 보다 빠르다. 하지만 6점의 홍패는 모두 관청이 왕명을 대신해서 발급했기 때문에 국왕의 직인이 없다. 반면 ‘최광지 홍패’에는 ‘성균생원 최광지 병과 제삼인 급제자’(成均生員 崔匡之 丙科 第三人 及第者)와 ‘홍무 이십이년 구월 일’(洪武 貳拾貳年 玖月 日)이라는 문장이 두 줄로 적혀 있다.
‘최광지 홍패’는 전래과정에서 문서의 가장자리가 손상됐다. 그러나 종이가 떨어져나간 부분을 살펴보면 ‘왕지(王旨·왕의 명령 또는 사령장)’로 추정되는 글씨가 보인다.|박성호의 논문에서 |
무엇보다 발급연월일 위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가 찍혀 있다. ‘고려국왕지인’은 1370년(공민왕 19년) 명나라 황제 홍무제가 고려에 내려준 국새이다. 조선 건국 후인 1393년(조선 태조 2)년에 명나라에 반납됐다. 고려 시대 공문서에 이 직인이 찍힌 사례는 ‘최광지 홍패’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조선 태조 1년) 10월에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 이제(?~1398)에게 내린 ‘이제 개국공신교서’(국보 제324호)에 이 ‘고려국왕지인’이 사용된 사실이 있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1책. |문화재청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최광지 홍패’를 연구한 논문(박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새로 발견된 고려말 홍패의 고문서학적 고찰과 사료로서의 의의’, <고문서연구> 48, 한국고문서학회, 2016)은 “홍패 가장자리에 손상된 글자를 복원해보면 ‘왕지(王旨·왕명)’라는 문서명이 보인다”면서 “이 ‘왕지’ 문서명과 국왕의 인장이 찍힌 것으로 보아 다른 고려시대 홍패와 달리 왕명을 직접 실천한 공식문서로서 완결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로 계승되어 조선시대 공문서 제도에 큰영향을 끼쳤다.
‘최광지 홍패’는 전북 부안 연곡리에 있는 유절암이라는 전주 최씨 송애공파 종중의 재실에 소장된 고문서 가운데 포함돼 있었다. 그러다가 2015년 유절암을 우연히 방문한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장이 이 홍패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후 장서각 차원에서 본격적인 현지 조사에 나섰다. 그렇게 존재가 알려진 ‘최광지 홍패’는 2015년에 개최된 장서각 특별전(시권·試券 국가경영의 지혜를 듣다)를 통해 일반에 공개된 바 있다.(박성호의 논문에서)
문화재청은 이 ‘최광지 홍패’와 함께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1책과 조선후기 백자 항아리 1점 등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육조대사법보단경’은 1290년(고려 충렬왕 16) 원나라 선종의 고승 몽산덕이(1231~1308)가 편찬한 책을 고려 수선사에서 당시 제10대 조사(祖師)인 혜감국사 만항(1249~1319)이 받아들여, 1300년(충렬왕 26년) 강화 선원사(禪源寺)에서 간행한 판본이다. ‘육조대서법보단경’은 중국 선종의 제6조인 당나라 혜능(638~713)이 선종의 창시자인 달마대사의 법계를 이은 6대 조사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과정 등을 위해 설법한 책이다. 제자들이 집성했다. ‘육조대사법보단경’은 혜능의 선사상을 이해하거나 선종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경전이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백자항아리(부산대 소장). 17세기말~18세기초 관요백자의 제작기술이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자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 중 크기와 기법 면에서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문화재청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또 다른 보물로 지정예고된 ‘백자 항아리’(부산대박물관 소장)는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제작된 대형 백자(높이 52.6cm)이다. 구연부와 어깨에 미세하게 금이 간 것을 수리하였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형태는 좌우가 약간 비대칭을 이루고 있으나,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담담한 청색을 띤 백색의 유약이 고르게 발라져 전체적으로 우아한 품격을 나타낸다. 당시 관요백자의 제작기술이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자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 중 크기와 기법 면에서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