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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강화, 김태우 기자]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나아져야 했다. 욕심이 생겼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미국의 한 겨울 캠프를 찾았다. 이케빈(27·SK)의 의욕은 그렇게 활활 불타고 있었다.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 그랬다.
2016년 드래프트에서 삼성의 지명을 받은 이케빈은 큰 기대를 모았다. 가지고 있는 기량과 잠재력은 물론, 미국에서 학교를 나와 KBO리그 프로지명을 받은 독특한 경력까지 화제를 몰고 다녔다. 스프링캠프까지만 해도 그는 언론과 팬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스타였다. 그러나 프로무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벽에 부딪혔다. 해답을 찾기 위해 찾은 게 바로 겨울 캠프였다.
하지만 그 겨울 캠프가 이케빈의 야구 인생을 끝내는 빌미를 제공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훈련 도중 타구에 오른쪽 머리를 정통으로 맞았고, 이는 총 4번의 수술로 이어졌다. 그리고 외눈으로 던진 마지막 1년을 뒤로 한 채, 이케빈은 이제 그토록 입고 싶었던 프로 유니폼을 자진해 벗는다.
불의의 사고, 한쪽 눈을 앗아가다
“미국은 11월에서 2월까지 비시즌인데 대학 선수와 프로 선수들이 참가하는 캠프가 있다. 개인 훈련을 하기 위해 이 캠프를 찾았다. 당시 홈에서 3루 쪽으로는 수비 연습이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2루에서 1루 쪽으로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펑고를 치는 것을 확인하고 공을 던지는 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앞이 깜깜해졌다. 공을 오른쪽 머리에 맞은 것이다. 난리가 났다”
이케빈은 2016년 말 부상 상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케빈은 “야구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공을 맞을 때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공포스러웠던 당시 상황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해프닝과 치명적 부상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하필 정통으로 오른쪽 머리를 강타했다. 곧바로 대수술이 이어졌다. 뼈는 물론, 시신경도 크게 손상됐다.
이케빈은 “망막 수술을 받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백내장이 없었다. 5~10년 내에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그런데 백내장이 1년 만에 생겼다”고 설명했다. 악화된 이케빈의 오른쪽 눈은 점차 시력을 잃어가더니 결국은 실명 상태에 이르렀다. 이케빈은 “지금은 오른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색깔 정도만 흐리게 보인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신체는 복합 작용이다. 오른쪽 눈을 잃으면, 왼쪽 눈에는 자연히 부하가 걸리기 마련이다. 불행하게도 왼쪽 눈에도 백내장이 진행될 수 있다는 진단을 최근 받았다. 퓨처스리그(2군) 경기 위주로 뛰면서 햇빛을 많이 받은 것이 상태를 악화시켰다. 이케빈이 은퇴를 결심한 결정적 배경이다. 이케빈은 “왼쪽 눈 상태가 더 좋아지기는 어렵다.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야구는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택지가 없었다. 구단 관계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은퇴하겠다고 했다. 구단 관계자는 “이케빈이 은퇴하겠다고 말하면서 펑펑 울었다”고 안쓰러워했다. 이케빈은 “누구나 언젠가는 유니폼을 벗지만 너무 아쉽다. 타구에 맞은 것은 너무 억울하다. ‘하필 내가 맞아야 했을까’를 떠나 ‘타구가 누군가를 향해야 했을까’는 생각이 많이 든다”고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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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없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사실 이케빈은 지난해 이맘때에도 은퇴를 생각했다. 삼성에서 방출된 직후였다. 뛸 곳이 사라졌고 눈도 나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은퇴를 하지 못한 것은 SK의 부름 때문이었다. 방출이 된 직후 SK의 테스트 제안이 왔다. 몸 상태와 야구 욕심을 사이에 두고 고민이 많았지만, 이케빈은 이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일단 2019년을 버티고 눈 수술을 받아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으나 이케빈은 외눈으로 던진 1년을 마지막 추억으로 남겼다.
퓨처스리그(2군)에서 많은 것을 배우며 재미도 느꼈다. 1경기이기는 하지만 KBO리그에서 처음으로 1군 무대를 경험하기도 했다. 6월 4일 고척 키움전에서 선발로 나가 혼신의 힘을 다한 모습은 많은 팬들에게 감동으로 남았다. 그런데 당시에도 타구에 오른손을 맞았다. 지긋지긋한 공과의 악연. “또 공에 맞을지 모른다”는 트라우마를 끝내 벗지 못했다.
이케빈은 12일 1년간 머물렀던 강화SK퓨처스파크를 떠난다. 조만간 1군 코칭스태프 및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SK와 인연을 정리할 예정이다. 이케빈은 “지명을 받을 당시 무조건 한국에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짐을 다 들고 왔다. 짐이 너무 많다. 이것을 어떻게 옮길지도 고민”이라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케빈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사실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시력을 잃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보다 금전적으로 훨씬 더 윤택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후회되지는 않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이케빈은 “전혀 후회가 없다”고 표정을 고쳤다. 이케빈은 “너무 많은 추억, 인연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케빈은 “미국에서 한국 문화를 배우기는 어렵다. 한국 문화를 배운 것 자체만으로도 후회는 1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 “사실 나는 팬들이 기대할 만한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말을 많이 들었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인천SK행복드림구장에 갔을 때 주차장에서 팬분들이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너무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솔직히 예정된 수술 외에는 없다. 조금은 쉬고 싶기도 하다”고 답했다. 수술을 마친 뒤 부모님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 갈 예정이다. 지명 이후 부모님과 줄곧 떨어져 살았던 이케빈은 “집밥이 먹고 싶다. 피자를 좋아하는데 이제는 원 없이 먹을 것”이라고 밝게 웃었다. 이제 이케빈은 야구선수가 아닌, 조금은 더 평범한 사람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중국적자인 이케빈은 미국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과 인연을 정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계속 생활하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프로 선수 출신에다 영어에 능통한 이케빈이기에 투수로서의 능력이 아닌, 다른 능력을 활용하고자 하는 직장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게 한국에서의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케빈의 조금은 특별한 작별 인사는, 새로운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스포티비뉴스=강화, 김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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