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 30일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2회전에서 페르난도 베르다스코와 경기를 펼치고 있다. AP=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현(23ㆍ한국체대ㆍ170위)이 돌아왔다. 장기전을 버티는 체력과 강인한 정신력, 패색이 짙었을 빛나는 위기 관리 능력까지 지난해 세계랭킹 19위까지 올랐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정현은 30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2회전에서 페르난도 베르다스코(36ㆍ스페인ㆍ34위)를 3-2(1-6 2-6 7-5 6-3 7-6<7-3>)로 꺾고 기적 같은 역전승을 완성했다. 정현이 그랜드슬램 3회전에 진출한 것은 2017년 프랑스오픈, 2018년 호주오픈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정현은 다음달 1일 ‘흙신’ 라파엘 나달(33ㆍ스페인ㆍ2위)과 16강 진출을 놓고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정현은 이날 수 차례 벼랑 끝에 몰렸지만 타고난 위기 관리 능력으로 베르다스코를 제압했다. 2경기 연속 풀세트 접전 끝 승리다. 정현은 세트스코어 0-2로 몰렸을 때도, 마지막 세트 상대의 매치포인트 위기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정현은 고등부 시절부터 위기에 강한 선수였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남자 복식 준결승전이 가장 대표적인 장면. 당시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었던 정현은 임용규(27)와 함께 짝을 이뤄 준결승에서 인도를 상대로 매치포인트 위기를 4번이나 맞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승리, 한국에 28년 만에 금메달을 안겼다. 벼랑 끝에 몰릴 때마다 터져 나온 정현의 절묘한 샷이 주효했다.
지난해 7월에는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가 집계한 ‘위기 관리 지수(Under Pressure)’에서 247.6점으로 1위에 올랐다. 니시코리 케이(30ㆍ일본ㆍ7위)와 로저 페더러(38ㆍ스위스ㆍ3위) 등 유수의 선수들을 모두 제쳤다. 2016년 도입된 이 지수는 리턴 게임에서 브레이크 포인트 기회를 살릴 확률, 서브 게임 브레이크 위기에서 탈출할 확률, 타이브레이크 승률, 마지막 세트 승률을 합산해 환산한 수치다. 올해엔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해 순위표에서 정현의 이름을 찾을 수 없지만, 그가 얼마나 위기에 강한지 알 수 있는 지표다.
정현은 이날도 경기 초반 베테랑 베르다스코에 밀려 두 세트를 연속해서 내줬다. 1세트에선 퍼스트 서브 성공률이 47%에 그치며 26분 만에 무릎을 꿇었고, 2세트에서도 속절없이 무너지며 세트스코어 0-2로 몰렸다.
모두가 패배를 예상했던 3세트부터 정현의 진가가 발휘됐다. 포핸드가 살아나면서 6-5에서 마지막 리턴 게임을 브레이크, 첫 세트를 따냈다. 상승세를 탄 정현은 4세트를 손쉽게 가져오며 승부를 5세트까지 끌고 갔다.
정현은 마지막 세트에서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게임스코어 3-5에서 맞이한 베르다스코의 서브 게임. 한 게임만 더 내주면 경기를 내주는 상황에서 정현은 상대 실책으로 브레이크 포인트를 잡은 뒤 절묘한 리턴으로 4-5로 추격했다. 정현은 5-6으로 뒤진 채 맞이한 서브 게임에서 다시 30-40 매치포인트에 몰렸다. 하지만 이번엔 포핸드 위너로 기어이 역전, 승부를 타이브레이크로 끌고 갔다. 정현은 게임을 따내자 포효하며 관중들의 박수를 유도하는 등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현은 결국 타이브레이크에서 초반 5연속 득점에 성공하며 역전극의 마침표를 찍었다. 정현은 이날 위너(42-49), 서브 에이스(8-10) 등 모든 공격 수치에서 베르다스코에 뒤졌지만, 언포스드 에러를 52개만 범하며 베르다스코(65개)보다 집중력에서 앞섰다.
3회전에서 정현을 기다리고 있는 건 세계랭킹 2위 나달이다. 그랜드슬램 18회 우승, US오픈 3회 우승에 빛나는 나달은 이번 대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로 ‘포기를 모르는 남자’의 원조다. 올해 8월 기준 ATP 세계랭킹 50위권 선수 중 2019 시즌 리턴 게임 0-40 상황에서 5회 이상 브레이크 성공한 선수는 나달이 유일하다.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라는 의미다. 역대 맞대결에서도 2전 전승으로 나달이 앞서지만, 포기를 모르는 두 선수의 대결인 만큼 섣불리 승부를 예단하기 힘들다.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