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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이슈 [연재] 중앙일보 '김식의 야구노트'

[김식의 야구노트] 류현진은 어떻게 빅데이터 시대 괴물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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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평균자책점, 21세기 최저

슬라이더와 식별 힘든 커터 구사

철저한 분석·정교한 제구가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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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가 쏟아지는 메이저리그에서 류현진(LA 다저스)의 제구력과 변화구 구사 능력은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꼽힌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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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척 쉬웠다. 그가 원하는 코스로 던지게 해주면 그만이었다.”

지난 1일 메이저리그(MLB) 콜로라도 로키스 원정경기에서 LA 다저스가 5-1로 승리한 뒤 다저스 포수 윌 스미스(24)가 한 말이다. 스미스는 류현진(32)과 처음 호흡을 맞춘 소감을 “야구가 쉬웠다”는 말로 요약했다. 이날 경기는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필드(해발 1600m)에서 열렸다. 콜로라도 타자들은 6월 29일 같은 곳에서 홈런 3개(4이닝 9피안타 7실점)를 때리며 류현진을 무너뜨렸다. 33일 만의 리턴매치에서 류현진은 6이닝 3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다.

스미스 말을 통해 류현진이 어떻게 이 경기를 준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류현진은 타자·이닝에 따라 공 배합을 모두 다르게 계획했다. 또 컷패스트볼(커터)을 평소보다 느리게, 대신 낙폭이 크게 던졌다. MLB닷컴에 따르면 이날 투구 80개 중 커터가 26개였다. 대부분 ‘슬라이더 같은 커터’였다. 류현진의 커터는 평균 시속 140㎞로 왼손 타자 바깥쪽으로 살짝 꺾인다. 쿠어스필드에서는 평균 시속 132㎞의 커터를 던졌는데, 변화 폭이 슬라이더만큼 컸다. 류현진은 “좌타자에게 슬라이더를 던진 게 주효했다”고 밝혔다.

2014년 체인지업의 위력이 떨어지자 류현진은 슬라이더를 제2의 구종으로 활용했다. 2017년 커터를 익힌 뒤로는 슬라이더를 던지지 않다가 오랜만에 비장의 무기로 썼다. 류현진이 쿠어스필드에서 던진 커터는 콜로라도 타자들 ‘메뉴판’에 없었다. 예전의 커터보다 더 꺾이는 공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커터가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같은 팀 감독조차 식별하기 어려운 류현진의 이 구종으로 인해 상대 타자는 더 혼란스럽다. 류현진을 상대로 통산 10타수 무안타(4삼진)인 MLB 최고 타자 마이크 트라우트(28·LA 에인절스)는 “류현진이 세 종류의 슬라이더를 던진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MLB 전체 평균자책점 1위(1.53)인 류현진이 지금의 페이스로 시즌을 마치면 21세기 MLB 투수 중 가장 낮은 평균자책점의 주인공이 된다. 조정 평균자책점(각 시즌 투수의 평균 능력을 100으로 정하고 우열을 가리는 지표)을 봐도 라이브볼 시대(공의 반발력이 높아져 타자에게 유리해진 시기)가 시작된 1920년 이후 류현진은 MLB 역대 2위(272)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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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간 조정 평균자책점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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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평균자책점 역대 1위는 2000년 페드로 마르티네스(291)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 같다고 해 ‘외계인’으로 불렸던 마르티네스는 마구 같은 체인지업으로 강타자들을 압도했다. ‘마스터’란 별명을 가진 그레그 매덕스는 현란한 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매덕스가 류현진에 이어 역대 조정 평균자책점 3, 4위(1994, 95년)다.

현재 MLB에는 시속 160㎞의 강속구 투수가 흔하다. 구장 곳곳에서 속도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진짜 승자는 MLB 투수 평균 패스트볼(시속 150㎞) 속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공을 던지는 류현진이다. 리그를 뒤흔들 무기는 없어도, 4가지 구종을 모두 정교하게 구사하는 덕분이다. 팬그래프닷컴에 따르면 올 시즌 류현진의 패스트볼(7.9), 체인지업(17.5), 커터(3.4), 커브(1.0)의 구종 가치는 MLB 평균(0) 이상이다.

허구연 해설위원은 “MLB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과학화가 되어 있다. 데이터를 직접 연구하고 릭 허니컷 투수코치에게 발표할 만큼, 류현진이 상대 분석을 열심히 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경기 중에 류현진이 수첩을 보고 데이터를 참고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류현진은 제구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데이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MLB는 정보 그 자체보다 정보 활용 능력이 중요한 ‘오픈북’ 시험장이다. 공유된 정보를 바탕으로 완성도 높은 답안지를 제출하는 게 빅데이터 시대의 최고 경쟁력이다. 이 시험에서 류현진은 현재 단연 세계 1등이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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