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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보다 앞선 고대 국가 ‘에트루리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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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보다 앞선 고대 국가 ‘에트루리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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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불멸’ 사후 세계관 지녀

연회 모습 같은 무덤 뚜껑 많아
8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사진은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차. 연합뉴스

8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 언론공개회에서 참석자들이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사진은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차. 연합뉴스


서양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로마에 앞서, 이탈리아에 독자적 문화를 남긴 국가가 있다. 기원전 10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지속됐던 에트루리아다. 우리에겐 조금 생소한 이름이지만, 한때는 중부 이탈리아 대부분(북쪽으로 포강 유역, 남쪽으로 캄파니아 지역)을 지배할 만큼 융성한 국가였다. 공화정이 시작된 기원전 509년 이전의 로마는 이들 에트루리아 출신 왕 3명의 통치를 받았을 정도다.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남부에 세운 식민지에 맞닿았던 그리스의 알파벳과 세계관 등 문명을 적극 받아들였고, 이는 곧 로마로 흘렀다. 에트루리아의 기원과 언어, 종교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지만, 서양 고대사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에트루리아 역사와 문화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 전시가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이탈리아 피렌체국립고고학박물관, 구아르나치 에트루리아박물관 등에서 날아온 석상과 금속공예품, 전차 등 총 300여점이 전시된다.
각각 기원전 6세기, 기원전 7세기 제작된 에트루리아 브로치와 머리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각각 기원전 6세기, 기원전 7세기 제작된 에트루리아 브로치와 머리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에트루리아인은 건축과 조각, 공예 등 분야에서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 주변의 라틴족이나 사비나족이 농업에 치중했던 반면,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광물자원을 바탕으로 광업, 제조업, 상업 등에 일찍이 공을 들인 덕이다. 전시장에 놓인 기원전 4세기 후반의 청동 거울과 기원전 7세기의 황금 피불라(일종의 브로치)를 보면 이들의 감각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거울의 손잡이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상아로 덧대어진 데다 본체엔 고귀한 신들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피불라는 2,500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각으로도 세련됐을 정도로 아름답다. 에트루리아인은 당시부터 그래뉼레이션(아주 작은 금 알갱이들을 금판이나 은판에 붙여 장식하는 기법) 등을 사용해 온 것으로 기록된다. 한국에서 그레뉼레이션 기법은 기원전 1세기부터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세기 제작된 에트루리아 석관. 망자가 연회에 참석한 듯한 모습으로 조각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원전 4세기 제작된 에트루리아 석관. 망자가 연회에 참석한 듯한 모습으로 조각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0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서

전차 등 유물 300여점 전시

사후세계에 천착했다는 점도 에트루리아인의 특징이다. 전시품 가운데 상당수가 신을 향한 봉헌물이나 화려한 유골함으로 채워진 이유다. 특히 내세에도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귀족들의 무덤 뚜껑은 망자가 연회에 참석한 듯한 모습으로 조각된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기원전 4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석관의 뚜껑에는 망자가 비스듬한 자세로 누워 오른손에 파테라라 불리는 잔을 들고 있다. ‘에트루리아 유적 기행기’(1932)를 쓴 영국 소설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1885~1930)는 이에 대해 “에트루리아인들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보석과 와인, 그리고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 있는 삶의 즐거운 연장이었다”고 기록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에트루리아를 복속시킨 로마는 여러 방면에서 에트루리아의 문명을 흡수했다. 격자 형식의 도시 설계, 지붕이 없는 안뜰을 둘러싸 거실을 배열하는 가옥 양식, 수도 시설이나 둥근 천장 등이 그렇다. 1970년대 들어 에트루리아 유물 발굴 작업이 본격화하면서 지금까지도 유럽의 역사학계가 이곳에 주목하고 있다.
[저작권 한국일보] 이탈리아 반도 내 에트루리아 지도. 빨간색은 기원전 750년 당시 영역, 주황색은 이보다 확장된 기원전 750년~기원전 500년쯤의 영역이다. 송정근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이탈리아 반도 내 에트루리아 지도. 빨간색은 기원전 750년 당시 영역, 주황색은 이보다 확장된 기원전 750년~기원전 500년쯤의 영역이다. 송정근 기자


그리스, 로마와 에트루리아 문화의 차이는 여성들의 위상이 높았다는 점이다. 귀족 여인들은 모계 조상의 이름을 따라 아이들의 이름을 지었고 남성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아내의 무덤이 남편의 것보다 더욱 성대한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에트루리아 무덤 벽화에선 여주인이 연회를 관장하거나 남녀 무용수가 뒤섞여 춤을 추는 등 여성 역할이 능동적으로 그려진 경우가 많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에트루리아는 한국으로 이야기하면 청동기 시대와 유사한데, 한국이 청동기 당시 단군을 시조로 삼는다는 것에 대비해 보면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는 10월 27일까지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