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구 (전) 회장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다.”
지난 4월 10일 금호그룹이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에 제출한 자구계획을 본 뒤 나온 금융권 반응이다. 자구계획을 거칠게 요약하면, 확실한 담보라고는 오너 일가의 200억원어치 금호고속 지분에 불과한데, 경영정상화에 필요한 5000억원을 빌려달라는 게 골자다.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이나 유상증자 같은 방안은 쏙 빠졌다. 게다가 3년 안에 경영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아시아나항공을 팔겠다는 단서를 달았는데, 이는 바꿔 말해 아들인 박세창 아시아나IDT 사장의 경영권을 3년간 보장해 달라는 얘기일 수 있다. 지난달 ‘아시아나항공 한정 감사보고서 파문’에 책임을 지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박 전 회장이 승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아들을 통한 우회경영 가능성도 제기한다. 한 차례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1년여 만에 복귀한 전력이 있는 그를 시장은 좀처럼 믿지 못한다.
아시아나 항공이 ‘기내식 대란’을 맞은 지 나흘째인 2018년 7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금호아시아나 본사에서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이 ‘기내식 대란’과 관련하여 사과 및 해명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
아시아나 매각 막을 현금 조달 어려워
이튿날 이 자구계획을 거부한 채권단 관계자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금호아시아나의 자구계획은 채권단 돈을 빌려서, 그것도 3년이나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박 회장 오너 일가는 아무런 실질적 희생 없이 금호아시아나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려 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아시아나 창립 이래) 30년이나 시간이 있었는데 3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채권단과 금호아시아나의 재무구조 개선 약정(MOU)은 오는 5월까지 한 달 연장된 상태다. 이 기간에 합의에 이르지 않으면 채권단은 채권 회수를 위해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으로 보인다. 금호그룹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아시아나는 금호고속, 금호산업, 아시아나항공, 아시아나IDT 등으로 이뤄진 그룹 내에서 그나마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알짜배기다. 아시아나를 잃으면 금호그룹의 규모는 쪼그라들 수 있다.
문제는 아시아나 매각을 막으려면 박삼구 일가는 사재를 털든, 우량자산을 매각하든 ‘현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여력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금호그룹 관계자는 “박 전 회장은 살고 있는 자택까지 이미 담보로 잡혀 있고, 이번에 내놓기로 제안한 부인과 딸의 금호고속 지분 외에 더 이상 내놓을 게 없다”고 말했다. 매각 가치가 있는 핵심 자산으로 에어부산 지분과 아시아나IDT 등이 꼽히지만 이 역시 담보가 설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매각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시아나항공의 유동성 위기도 언제든 불거질 수 있다. 총부채가 6조원이 넘는데, 당장 올해 1조2000억원을 상환해야 한다. 시장의 신뢰만 있다면 상환일 연장이 어렵지 않겠으나 지난 3월 부실한 감사자료 제출로 주식거래까지 일시 정지됐던 ‘감사보고서 한정 파문’으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다. 특히 부채비율이 1000%를 넘어서거나 신용등급이 1단계 하락할 경우 아시아나는 자산유동화증권(ABS)을 조기상환해야 하는데, 새 회계기준을 적용하면 부채비율은 850% 선까지 높아진다.
이 같은 상황에서 아시아나항공은 최근 주주총회에서 이형석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을 감사위원으로 선임하고, 모회사인 금호산업은 이근식 전 열린우리당 의원 등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아시아나의 부실경영도 문제지만, 이런 유동성 위기를 정치권에 줄대기 식으로 해결하려는 것도 문제”라며 “결국 문제를 키워 여기까지 오게 된 것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수백억 원대 상속세 탈루 의혹을 받은 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2018년 7월 5일 오전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
대한항공, 조원태 사장 경영능력이 관건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 4월 8일 갑작스럽게 타계한 대한항공의 처지도 비슷하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1700억원대에 이르는 상속세가 장남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의 ‘발등의 불’이 됐다.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 등으로부터 경영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터라 어떻게 재원을 마련하느냐에 따라 경우에 따라서는 대주주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
일단 절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은 대한항공, 진에어, 한국공항을 비롯한 한진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지주사 ‘한진칼’의 지분 28.93%다. 만약 이 지분을 팔아서 상속세를 낼 경우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20.03%로 줄어들면서 KCGI와 국민연금공단의 합산 지분율(20.81%)에 역전될 수 있다. 조 사장의 내년 한진칼 이사 연임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한진칼 지분을 제외한 한진, 정석기업과 대한항공 지분을 팔고 한진 등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을 신속하게 매각하는 한편, 배당금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한진칼 지분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CEO스코어의 주식현황 조사에 따르면 한진칼 총지분 중 27%에 해당하는 7.75%가 이미 금융권과 국세청에 담보로 잡혀 있다. 이래저래 계산이 복잡해진 셈이다.
한편 조양호 회장의 지분이 3남매에게 비슷한 비율로 상속되더라도 조현아·조현민 자매가 경영일선에 복귀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대신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장기적으로 3남매 간의 지분 정리 및 계열분리 등 숙제는 남겠지만, 당분간 지분을 공동보유하면서 조원태 대표이사에게 경영권을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장기적으로는 조원태 사장이 경영능력을 어떻게 증명하는지에 따라 오너 일가의 미래가 달렸다. 업계 관계자는 “고 조양호 회장을 보좌해온 석태수 한진칼 대표를 비롯한 전문경영인들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경영기조를 이어갈 수 있을지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 최신 뉴스 ▶ 두고 두고 읽는 뉴스 ▶ 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