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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있는 증언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다리소극장에서 열린 박창진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의 수기집 <플라이백>(메디치) 북 콘서트에 서지현 검사, 김승하 철도노조 KTX 열차승무지부장, 권수정 전 아시아나항공 승무원(현 서울시의원),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참석했다.
부당한 성추행과 인사보복 피해사실을 고발한 후 조직 내에서 ‘왕따’를 당한 여성 검사, 13년 동안 외롭게 복직 투쟁을 벌인 KTX 해고 노동자, ‘땅콩회항’ 사건 당시 박 지부장을 위해 유일하게 목소리를 내 준 ‘이웃’ 항공사의 노조위원장, 늘 같은 자리를 지키며 사회적 약자를 위해 싸워 온 비주류 정치인.
서로 다른 듯 닮은 이들은 <플라이백>에서 각자 인상깊었던 구절을 골라 낭독했다. 서 검사는 낭독 도중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애써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변영주 영화감독의 사회로 그 구절을 선택한 이유를 자신의 경험과 함께 이야기하며 서로의 기억과 고통에 대해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지현 : 박 지부장과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6월이다. 그때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울었다. 직업도, 성별도 다르지만 각자 ‘일’을 겪고 난 이후 벌어진 상황들이 너무 쌍둥이처럼 닮은 거다. 박 지부장은 대한항공의 ‘돌아이’가 됐고, 나는 검찰의 ‘미친X’이 됐다. 입을 열었다는 이유로 겪게 된 조직 내에서의 따돌림, 괴롭힘이 너무 유사했다. 아까 <플라이백> 에필로그를 낭독하면서 마치 내가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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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정 : 박 지부장은 ‘옆 동네’ 승무원이었다. 이 책에서 회사와 동료에게 버림받은 L모 임원에 대한 구절을 낭독한 이유는 저도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승무원 바지 유니폼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여승무원회 내부에서조차 왕따를 당하고 사과성명을 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특히 바지 유니폼에 반대하는 어떤 분은 내 비행 스케줄까지 입수해서 쫓아다니며 ‘내가 여승무원 인형도 산 사람인데, 여자라면 치마를 입어야지 바지를 입어서 되겠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런 식의 괴롭힘이 지속되자 친했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저에게 말을 걸지 않기 시작했다. 믿었던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가는 과정은 아무리 반복해서 겪어도 매번 새로운 상처가 되더라. 박 지부장이 뉴욕에서 그 일을 겪었을 때 대한항공 승무원 중 한명도 그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상황인지 증언해주지 않는 걸 보면서 (옆동네 승무원인) 나라도 입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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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 우리 사회는 늘 피해자가 떠나고 가해자는 남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은 용기있는 고발자이면서 생존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분들에게 너무 감사하다. 내가 비주류 정치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자 보람이기도 하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 아직 내가 해야 할 몫이 있다는 확신을 주는 분들이다.
김승하 : 13년 동안 KTX 해고 승무원으로 싸우다 철도공사 정규직으로 복직했지만 아직 승무원으로 돌아가지는 못하고 역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완벽하게 승리했다고 말하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13년 동안 저 역시 박 지부장처럼 많은 고난과 절망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집회 현장의 감동적인 장면을 선택해 낭독했다. 지금도 저는 아직 내부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사법농단의 피해자임에도 ‘쟤들은 대법원 판결까지 났는데 왜 떼를 쓰는 거야’라는 시선도 있고, 심지어 ‘특채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꿋꿋하게 옆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을 얻게 된다.
변영주 : 대한항공 집회 현장에서 한 대한항공 직원에게 ‘대한항공 기장들이 가장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무장이 박창진’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옳은 말을 하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을 신뢰해 주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도 투쟁을 지속하게 하는 힘 중 하나가 아닐까. 박 지부장에게 질문하겠다. 이 책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있었다면.
박창진 : 나의 나약한 마음, 부끄러움을 다시 들춰봐야 하는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데, 사회적으로 부각되고 알려지니까 어떤 사람들은 유명 사건의 주인공으로만 바라보더라. 우리는 사건에 연루된 피해자일 뿐이고 나약한 존재의 인간일 뿐인데. 우리도 여러분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일을 당한, 여러분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란 점을 알리고 싶어 썼다. 책을 쓴 또 다른 이유는 ‘연대’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지적 수준이나 나이가 되면 나 홀로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한창 잘난척 할 때는 그랬는데, 알고보니 누군가의 도움과 손길 덕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더라. 내가 누군가를 갈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탱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중 하나다.
변영주 : 박 지부장도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김승하 지부장은 13년이란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궁금하다. 포기하지 않고 끝내 버틴 이유는.
김승하 : 그런 질문을 종종 듣는데, 사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다. 저는 의지가 아주 강하거나 신념이 두터운 사람이 아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사기 당한 건데 당연히 싸워야지’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해결이 안되니까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정권이 바뀐다거나, 회사에 변화가 생긴다거나 하는 계기가 있어서 (어찌어찌) 희망을 놓지 않고 계속 싸움을 이어나갔다. 정말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소송을 한 건데, 대법원에서 결국 패소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 ‘그래, 나 이제 영원히 복직 못할 수도 있어. 어차피 내 커리어는 망했어’ 이런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그래도 누군가 끝까지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진 건 아니다, 내가 죽기 전까지는 지지 않은 상태로 계속 가겠다’ 이런 생각도 들고. 적어도 ‘KTX 해고 승무원들, 대법원에서 패하니까 1억 빚지고 쫄딱 망해서 뿔뿔히 흩어졌대’ 이런 말 들으면서 끝내진 말아야 한다는 각오가 생겼다. 사실 그때 이직과 새 일을 준비하려고 했던 타이밍이었는데, 어쩌면 (계속 싸우는게) 내 숙명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영주: KTX와 쌍용차는 ‘우리도 승리할 수 있구나’라고 용기를 주는 사례들이다. 얼마전 쌍용차에 복직한 노동자들이 점심 먹고 나와서 자기들끼리 배부른 표정으로 공장 담벼락에 앉아있는 사진을 SNS에 올린 걸 봤다. 아주 한심한(웃음) 사진이었는데, 그걸 보다가 엄청 울었다.
심상정 : 복직만을 위해서라면 그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없다. 자기 모든 인생이 망가지니까. KTX 해고승무원이나 쌍용차 노동자들은 아마 매일매일 도망치고 싶었을 꺼다. 그런데도 버틴 것은 복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 분들이 끝내 승리한 것은 우리 사회에 변화의 씨앗들이 쌓여가고 있는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제가 계속 정의당에서 정치를 해야 할 이유가 더욱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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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주: 얼마전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식에 갔더니 서지현 검사가 시민 상주로 와 계시더라. 사실 서 검사는 자신의 피해사실을 폭로한 후 거기에서 멈출 수도 있었다. 혹은 자신의 문제만을 위해 싸울 수도 있었고. 그런데 최근 행보를 보니 굉장히 올곧고 멋지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면 뭘까.
서지현 : 사실 나는 굉장히 수줍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내가 그때 입을 연건 용감해서가 아니라 정말 견딜 수 없어서였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2등 검사’였다. 잘 나가는 건 남자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자 못지 않아’가 가장 큰 칭찬이고. 그렇게 아등바등해도 항상 성추행, 성희롱을 일상적으로 겪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깟 엉덩이 만진게 뭐’라고 말한다. 사실 나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워낙 비일비재한 일이니까. 그런데 성추행에서 그친게 아니라 인사보복까지 하니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모욕을 참아가며 15년 동안 내 열정과 일생을 바쳐서 쌓아올린 걸 한 순간에 분해해버린 것 아닌가. 난 여성 검사 최초로 특수부까지 간 사람인데, 어느 순간 일 못해서 좌천된 검사가 돼 버렸다. 내 인생이 부정당하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피해자를 구제하려고 검사가 된 건데, 내 자신의 불의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내 피해사실조차 구제하지 못하면 검사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미리 써놓고 검찰 내부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그런데 내가 게시판에 글을 올린지 몇시간 만에 법무부에서 내 인사에 문제가 없다는 문자를 돌리면서 사건을 덮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 평생의 용기를 다 끌어내서 올린 글이 다시 묵살당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JTBC 인터뷰에 나간 거다. 사실 그때만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우리 집에는 공중파 밖에 안나와서 JTBC 뉴스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거기 나가서 생방송 인터뷰를 하는게 어떤 의미인지 감이 잘 안왔다. (일이 커진 후)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무섭고 두려울 때 박 지부장을 만났다.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이 온갖 조언들을 해줬다. ‘당장 사표를 내라’ ‘안된다. 절대로 사표 내선 안된다’.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 그때 박 지부장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셨다. “나도 너무 두려웠다. 너무 두려워서 처음엔 피하려 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했다. 근데 그랬더니 내 진의는 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내 말이 왜곡되더라. 그래서 나 자신을 믿고 내가 믿는대로 하는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말이 나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많은 말을 해주는데, 저는 그냥 제 자신을 믿고 제 자신이 선택한대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변영주 : 지금 이 순간에도 굉장히 힘들고 의지할 곳 없어 겁먹고 있는 분들이 어딘가에 계실 거다. 그 분들에게 한마디씩 해주신다면.
김승하: 제가 감히 뭐라고 조언을 드리겠냐만은, 이 길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길이란 걸 알기에 감히 그분들에게 용기를 내시라는 말을 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만약 용기를 내신다면 분명히 길은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쪽문은 반드시 열린다고 생각한다. 입을 열면 내가 갖고 있는 것마저 모두 잃고 바닥으로 추락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 수 있지만, 그걸 잃는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제 경험으로 말씀드리자면 완전히 불행해지지도 않는다, 다른 길을 선택하면 그 길에서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다른 종류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기억해 달라.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서지현: 저 역시 용기내라는 말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각자가 최대한의 용기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당신을 사랑하십시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믿으면 입을 열든, 열지 않든 살아갈 힘이 생길 겁니다.”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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