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전 결승골 주인공 황의조(왼쪽에서 세 번째)가 경기 종료 후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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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필리핀 같은 나라 만나면 볼 신나게 돌려가면서 다섯 알, 여섯 알 넣고 이기곤 했는데. 후반 21분까지 0-0은 너무했지.”
8일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의 알 막툼 스타디움에서 끝난 한국과 필리핀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본선 C조 조별리그 1차전을 TV로 시청한 어느 원로 축구인의 푸념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팀을 만나도 대량득점하며 시원하게 이기지 못하는 후배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송구스런 말씀이지만, 그건 진짜 ‘옛날’ 이야기다. 각국 축구대표팀의 경쟁력이 갈수록 상향평준화 되어가는 요즘, 우리가 자신 있게 ‘다섯 골 차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자주 붙어본 팀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오랜만에 만나는 팀은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 어렵고 또 껄끄럽다.
황의조가 필리핀 수비수와 공중볼을 다투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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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 벤투(50ㆍ포르투갈) 감독이 이끄는 우리 축구대표팀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16위 필리핀을 상대로 또 한 번의 교훈을 얻었다. 아시안컵 우승으로 가는 길이 결코 편안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하는 한국 축구가 지난 1960년 이후로 단 한 번도 우승컵을 품에 안지 못한 게 그저 운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당초 목표였던 승점 3점을 가져왔고 조 1위로 가는 디딤돌을 놓았으니 냉정히 평가해도 ‘실패’라 단정지을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출혈이 꽤 컸다. 당장은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으니 심각해 보이지 않지만, 머지 않아 적지 않은 부담감을 짊어져야 할 상황이다. VIP용 신용카드를 발급 받고 분위기에 취해 시원하게 긁었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비로소 청구서 걱정을 시작한 사람의 마음이랄까.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필리핀전 승리 직후 관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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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전의 가장 큰 손실은 세 장의 옐로카드다. 중앙 미드필더 정우영(30ㆍ알 사드)과 좌ㆍ우 풀백 김진수(27ㆍ전북), 이용(33ㆍ전북)가 각각 한 장씩 받았다. ‘불필요한 경고’라 단정지을 순 없지만, 없는 게 더 나은 상황인 건 분명하다. 경고 두 장을 받은 선수는 다음 경기에 출전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이 조별리그부터 8강전까지 적용된다. 해당 선수들이 향후 경기 중 과감한 파울이 필요할 때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축구든 농구든 몸싸움이 허용되는 종목에서 ‘파울 트러블’은 커다란 족쇄다.
세 선수 모두 벤투호 전술의 중심축 역할을 한다는 점이 우려의 핵심이다. 정우영의 경우 중원 파트너 기성용(30ㆍ뉴캐슬)이 햄스트링 부상으로 쓰러지며 공백이 발생한 만큼, 향후 기성용의 역할을 물려 받아야 할 가능성이 높다. 황인범(23ㆍ대전)도 있지만, 경험과 안정감 등에서 아직은 더 발전해야 할 부분이 많다.
김진수와 이용, 두 풀백의 옐로카드도 뼈 아프다. 벤투 감독은 중원에 두 명의 미드필더를 세우는 보수적인 포메이션을 가동하되, 좌우 풀백을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시켜 공격의 물꼬를 틔운다. 공격과 수비 지역을 폭넓게 오가며 찬스를 만들고 상대 침투를 저지해야하는 두 선수가 경고 걱정에 발목이 잡히면 곤란하다.
파울루 벤투 축구대표팀 감독이 필리핀전 도중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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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용의 부상은 ‘언제든 핵심 선수가 쓰러질 수 있다’는, 평범하지만 냉엄한 가능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아시안컵 개막을 즈음해 드러난 벤투호의 몇몇 개선 과제에 대해서 언론과 축구팬 뿐만 아니라 대표팀 내부적으로도 ‘손흥민이 돌아오면’이라는 옵션 하나만 주목하는 듯한 모양새다. 손흥민이 많은 문제점을 해결해줄 수 있는 특급 선수인 건 맞지만, 몇몇 선수에 의존해 ‘만약’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해선 안 된다.
우리 대표팀의 초반 문제점으로 드러난 골 결정력 부족 현상에 대해서도 손흥민의 합류 여부와 상관 없이 ‘플랜 B’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4-2-3-1 포메이션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선수 교체로만 변화를 주는 벤투 감독의 전술 운용 방식은 안정감을 높이는 대신 단조로움이라는 약점을 발생시킨다.
스웨덴 출신의 명장 스벤 요란 에릭손 필리핀 감독은 한국전을 앞두고 “한국에 대한 분석은 모두 끝냈다”고 했다. 경기 후에는 “아시아의 강호 한국을 상대로 이정도 찬스를 만들어내리라고 생각지 못했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우리가 진짜 경쟁해야 할 상대는 필리핀, 키르기스스탄, 중국이 아니라 결선 토너먼트에서 만날 아시아의 강자들이다.
축구팀장 milkyman@joongang.co.kr
황의조가 필리핀전 결승골을 터뜨리는 장면.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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