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사현장에서 토목 노동을 하는 강제징용 노동자들. /해외교포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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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범 기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손해 배상을 해야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안그래도 냉랭하던 한·일 관계가 얼어붙게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고(故)여운택(2014년 사망)씨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특히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주장에 대해 "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일본 외무성은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쌓아온 한일 우호협력관계의 법적기반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것"이라며 "대단히 유감이다. (판결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외무상 담화문을 발표했다.
외무성은 담화문에서 "한일 청구권협정은 일본이 한국에 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의 자금협력을 약속한 것과 함께 양 국가와 그 국민의 재산과 권리, 이익과 관련한 모든 청구권 문제는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돼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법원이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 주식회사에 대해 손해배상의 지불 등을 명령한 판결을 확정했다. 이는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에 명확히 반하는 것으로 일본기업에 대한 부당한 불이익을 지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국 측이 즉각적으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일본 기업의 경제활동을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국제 재판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시야에 두고 대응하겠다"고 덧붙였다.
외무성은 이수훈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招致, 불러서 항의함)해 이같은 입장을 재차 전달할 계획이다. 외무성은 또 향후 후속 조치를 위해 아시아·대양주국에 산하에 ‘일한 청구권 관련 문제 대책실’을 설치했다.
한국 정부는 이번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총리 주재 관계 장관회의를 열어 입장을 정리할 방침이다.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 "정부는 곧 총리 주재 관계장관회의를 거쳐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한 정부 입장을 말씀드릴 예정"이라면서 "이번 판결이 한일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한일 양국이 지혜를 모아야 할 필요성을 일 측에 전달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올초 강경화 장관이 2015년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사문화하는 정부 입장을 발표한 뒤,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외교부 발표에 따르면 정부는 청구권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 재검토한다고 했다"며 "재검토를 거쳐 정부 입장이 달라진다면 일본과 외교분쟁화돼서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신 전 대사는 이어 "위안부 문제도 꼬여 있는 상황에 강제징용 배상 문제까지 추가됐다"며 "과거사와 미래지향적 협력을 분리해 접근하는 투트랙 어프로치(접근)도 힘들어졌다. 한일 관계에 상당한 그림자가 드리울 것 같다"고 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 2005년 강제 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입장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정부 입장은 이해찬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민관합동 위원회에서 청구권 문제 교섭 과정을 검토해 내린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위원회에 참여했다.
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일본 정부에선 이번 대법원 판결을 국제법 위반으로 보고 대응에 나설 것"이라며 "한일 양국이 중재위원회를 설치해 합의에 나설 수 있지만, 이게 실패하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봉 선임연구위원은 "ICJ의 판단을 지켜본 다음 국내법 집행을 하는 방법도 있지만 국내 여론상 쉽지 않을 것"이라며 "현 정부가 ‘피해자 중심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생활고 해결 등으로 먼저 도움을 드리는 방식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번 판결로 인해 국제무대에서의 한국의 외교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외교 소식통은 "2015년에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도 정권이 바뀌자 무효화했다"며 "외국에선 ‘한국은 정권이 바뀌면 합의가 달라질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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