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애정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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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곳이 대파 봉지를 들고 가던 탤런트 예지원. 갑자기 대파를 쑥 뽑아들어 뒤따라오던 남자에게 휘두른다. 이 발랄한 캐릭터는 종종 미소 짓고, 속 깊은 행동을 하며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의 섬세한 결을 만들어낸다. 입체적 캐릭터만큼 몇 겹이고 다채로운 디테일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다. 등장인물들의 ‘1인 3닭’ 식탐은 만화처럼 유쾌하고, 요구르트 아줌마가 전동카트 타고 오는 장면은 웅장하다. 기이하지만 사랑스러운 이 드라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SBS |
드라마를 보게 될 줄 몰랐다. 일단 텔레비전이 없는 상태로 십 년 넘게 보낸 데다 언제부턴가 드라마라는 장르는 뭐랄까,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처럼 여기고 살았다. 수영을 하지 못하니 수영장에 가지 않는 삶이랄까? 그러면서도 새 드라마가 런칭하면 방송국 홈페이지에 들어가 등장인물의 내력을 살피고 시놉시스를 읽었다. 수영을 못해도 수영복에는 관심을 가지는 심리일까? 어쨌든 그랬던 내가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조마조마하며 보는 드라마가 생겼다.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이다.
리모컨을 돌리다 선글라스를 낀 예지원이 대파를 들고 가는 장면에 못 박혔다. 마치 화분처럼 소중히 들고 가고 있었다. 영화 '레옹'의 주제가로 유명한 스팅의 '셰이프 오브 마이 하트'가 흘러나왔기에 더 그렇게 여겨졌다. 예지원의 뒤에서 걸어오던 장발에 수염을 기른 한 남자는 줄자를 뺐다 넣었다 하면서 예지원과 거리를 좁히고 있었고. 뭔가 사달이 날 것 같았다.
그때 그 일이 벌어졌다. 파싸대기. 뒤로 돈 예지원은 검을 뽑듯 대파를 뽑아 그 남자에게 휘둘렀다. 내가 기함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바로 탈춤을 추는 신이 이어졌기에. 그 기이한 '이어 붙임'에 혼이 빠진 난 이 드라마를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연출자가 작가의 의도를 살려 드리블하고 있다고 느껴졌기에.
탈춤이 펼쳐진 무대는 어느 병원이다. 이 병원의 장기입원 환자는 탈춤 도구 운송차에 몰래 타 탈출을 시도한다. 탈을 벗은 탈춤 알바생이 다음 목적지를 말하는데 자기 동네였기 때문. 무사히 목적지에 내린 환자, 달라진 동네 풍경이 낯설기만 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13년 만에 동네에 왔다. 13년간 코마 상태로 있다가 얼마 전 깨어났기 때문이다.
열일곱에 교통사고를 당해 잠들어 있다가 일어났더니 서른이 된 것이다. 열여덟과 열아홉을, 그리고 이십 대를 보내지 못하고 바로 서른이 된 여자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이름은 우서리, 신혜선이 연기한다. 우서리가 살던 집을 찾아가는데, 예지원이 문을 열어준다. 예지원은 그 집의 가사도우미. 집주인으로부터 '조카'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우서리가 '이 집 조카'라고 했기 때문에.
드라마의 핵심 갈등은 여기서부터다. 예지원이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집의 조카는 따로 있으며, 그 조카는 열아홉 살 남자. 우서리와 남자 조카와 남자 조카의 삼촌인, 현재 그 집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우진이 만난다. 우서리가 13년 전 그 집에 살았었고, 그 후 이사 온 이들이 공우진 가족이다.
우서리는 13년 전 그 집에 외삼촌 부부와 살았다. 건축가였던 아버지가 그 집을 지었는데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외삼촌 부부와 살았던 거다. 그런데 우서리가 코마 상태로 있는 동안 외삼촌 부부는 집을 팔고 이사를 갔고, 우서리로부터도 사라졌다. 우서리의 과거를 증명해줄 수 있는 게 현재로서는 공우진 가족이 살고 있는 집밖에 없다. 우서리는 과거의 집주인답게 공우진 가족이 몰랐던 집의 비밀들을 알려주고, 이런저런 갈등 끝에 한 달만 자신의 집이었던 공우진의 집에 얹혀살기로 한다.
그리고 '팽'이 있다. 거의 거동하지 않던 공우진의 노견 '덕구'는 우서리를 보고 달려와 적극적으로 안긴다. 바이올린 유망주였던 우서리가 쇼팽의 이름을 따 '팽'이라 이름 붙였던 강아지는 우서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 공우진이 키우면서 '덕구'가 되었던 것. 이제, 공우진에 대해 말해야 할 타이밍이다. 공우진은 무대 디자이너로 세상 모든 것의 사이즈를 재고 다닌다. 아무 때나 줄자를 빼어 들어 종종 변태나 치한으로 오해받기 십상. 예지원에게도 파싸대기를 맞은 바 있다. 그리고 음악을 듣지 않으면서 이어폰을 꽂고 다닌다. '들을 수 없으니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라는 사인인 것인데, 실제로는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다. 최소한의 인간관계도 기피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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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나는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조마조마' 하며 이 드라마를 본다고 썼다. 그건 이 드라마가 품고 있는 무수한 디테일 때문이다. 제니퍼가 감자를 사러 간 마트의 감자 판매원은 '불량 감자' CF로 유명해진 남자였고, 우서리가 알바에서 '짤렸다'라고 말할 때 고단하게 춤추던 바람 인형이 쓰러지고, 요구르트 아줌마는 전동카트를 타고 온다. '두 두 두 두 두' 하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뭔가 예감을 한 이들이 고개를 돌리면 요구르트 아줌마가 전동카트를 타고 가까워지는 이런 장면들 때문에 이 드라마를 보면서는 손톱을 깎을 수가 없다.
조정 선수인 공우진의 조카 유찬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그는 방에 '대동맛지도'를 두 개나 붙여두었고, 사물을 묘사할 때도 '크림 파스타색 원피스'라든가 '천엽 같은 게 달린 옷'이라는 식이며, 유찬네 삼총사는 '일인삼닭'을 하며, 요구르트를 마실 때는 다섯 개에 모두 빨대를 꽂아 연달아 마신다. 유찬이 어느 날 쓰러지는 자전거들을 몸으로 막고 데려온 병아리는 '찬이삐약주니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참고로 드라마 홈페이지 등장인물란에는 '덕구(구 팽)'와 '찬이삐약주니어'도 소개되어 있다. 골치 아플 거라는 친구들의 우려에도 데려온 이 병아리가 닭이 되어서 유찬 앞으로 비칠비칠 걸어오는 장면을 보았다. 나는 이런 장면을 넣어주는 드라마를 애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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