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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2 (토)

[월드컵★] '황새' 황선홍, 청춘부터 중년까지 '한국 축구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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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황선홍이 포효하고 있다.


[월드컵★]은 2018 러시아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한국축구의 월드컵 4강 신화에 빛나는 2002한일월드컵 주역 7명의 활약상과 근황을 짚어보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스포츠서울 조윤형 인턴기자] 신예 때부터 선수 은퇴할 때까지 황선홍(49)은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

'황새'로 불린 황선홍은 1990 이탈리아월드컵을 시작으로 1994 미국월드컵, 1998 프랑스월드컵, 2002 한·일월드컵에 이르기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를 4회 연속 밟았다. 태극마크를 달고 A매치 통산 103경기(50골) 출전으로 센추리 클럽(A매치 100경기 이상)에 가입했다.

황선홍의 국가대표 생활은 다사다난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1988 카타르아시안컵에서 국가대표에 처음 발탁된 그는 한일전 득점으로 화려한 데뷔 무대를 장식했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예선전을 거치면서 차세대 스트라이커로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황선홍은 1994 미국월드컵 본선 C조 조별리그 2차전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부진한 경기력 때문에 큰 비난을 받았다. 당시 스페인과 1차전을 2-2로 비긴 후 한국 축구 사상 최초 16강을 이뤄내기 위해선 볼리비아전에서 반드시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황선홍은 네 차례 중거리슛을 모두 날리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가 독일과의 3차전에서 득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홈런볼'이라는 꼬리표는 그를 따라다녔다.

월드컵에서의 불운도 이어졌다. 황선홍은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으나 대회를 앞두고 가진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오른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선수단과 함께 프랑스 땅을 밟았지만 결국 부상으로 경기에는 나서지 못했다. 최고의 골 감각으로 주가를 높이고 있던 황선홍이었기에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선홍에게 2002 한·일월드컵은 더욱 간절했다. 당시 34세였던 황선홍은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에서 선제골을 작렬했다. 네 번째 맞이한 월드컵에서 터진 선제골로 그간의 한(恨)을 모두 날려보냈다. 축구 인생에서 환희와 좌절을 모두 맛본 황선홍이 4강 신화의 포문을 연 순간이었다. 그는 같은 해 11월 열린 브라질전을 끝으로 14년간 달았던 태극마크를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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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5일 본지 1면>

48년 한풀었다
황선홍-유상철 골… 골

["슛~ 골~인!" 한국 축구의 기념일로 기록될 6월 4일 한반도 전역은 "대 !한! 민! 국!"을 목청껏 외치는 5000만 국민의 함성으로 크게 메아리쳤다. 한국 축구에 감격적인 새 역사가 만들어졌다. 한국 대표팀의 간판 골잡이 황선홍과 중거리포가 좋은 유상철의 연속골을 앞세워 월드컵 본선 도전 48년사에서 마침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국은 4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벌어진 2002 한·일월드컵 축구 대회 본선 1라운드 조별리그 D조 첫 경기에서 동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2-0으로 꺾고 54년 스위스 월드컵 출전 이후 6차례의 월드컵 본선 도전 끝에 역사적인 첫 승을 일궈냈다.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투입된 '황새' 황선홍은 전반 26분 골 지역 왼쪽에서 왼발 논스톱 터닝슛으로 폴란드의 골문을 열어젖혔고, 유상철도 후반 8분 오른발 중거리슛으로 추가 골을 터뜨려 5000만 국민의 가슴에 48년간 켜켜이 쌓였던 체증을 속시원히 날려버렸다.

황선홍은 월드컵 본선 두 번째 골로 A매치 통산 50골의 기념비도 함께 세웠다. 유상철은 98 프랑스월드컵에 이어 2개 대회 연속골을 기록했다. 이로써 한국은 D조 가운데 가장 먼저 승점 3점을 기록하며 1위로 나서 16강이 겨루는 2라운드 진출에 유리한 발판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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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첫 골을 넣고 세레머니 중인 황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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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 미국과의 경기에서 부상당한 황선홍이 응급 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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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한 'H-H(황선홍-홍명보) 라인'의 대표팀 은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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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현대오일뱅크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황선홍 감독.


한국 축구 역사상 대표 골잡이는 1960년대 최정민을 기점으로 1970년대 이회택, 1980년대 차범근-최순호 그리고 1990년대 황선홍이 있다. 폭넓은 시야와 감각적인 슛 능력을 지닌 황선홍은 한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중요한 인물이다.

실제로 1993년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한 그는 8경기 연속골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적 있다. 1998년 J리그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한 후 24골 8도움을 기록해 대한민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J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득점왕'의 도전은 계속됐다. 그는 2003년 2월 은퇴를 선언한 뒤 곧바로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전남 드래곤즈 2군 코치,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취임해 경험을 쌓았다. 2010년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능력은 빛났다. 2012년 포항의 FA컵 우승을 견인했고 2013년 정규리그와 FA컵을 동시에 제패하는 '더블'을 달성했다. 특히 '더블'은 외국인 선수 없이 이뤄낸 성과여서 더욱 뜻깊었다. 이를 계기로 황선홍은 K리그의 명장 반열에 올라섰다.

2016년 6월 FC서울의 지휘봉을 잡은 그는 부임 5개월 만에 K리그 우승컵을 차지했다. 그러나 기대가 높았던 탓일까. 이듬해 FC서울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조기 탈락함과 동시에 리그 순위 5위에 머물렀다. 분위기를 타기 힘들었고 반등의 기회 역시 잡지 못했다. 결국 황선홍은 지난 4월 FC서울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했다.

돌파구를 찾지 못한 '황새'는 스스로 날개를 접어야만 했다. 하지만 황선홍은 '한국 축구' 그 자체다. 그는 20대 초반 국가대표에 데뷔해 30대 중반까지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볐다. 40대에는 지도자로서 경기장을 지켰다. 한 번도 잔디밭을 떠난 적 없는 그를, 쉬지 않고 달려온 그의 축구 인생을 응원한다.

yoonz@sportsseoul.com

사진 | 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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