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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매일 8시간 연습… A부터 Z까지 다 맞춰져 있지 않으면 불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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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0주년 콘서트 앞둔 '歌王' 조용필 인터뷰]

"음악을 잘하고 싶었고 못해서 화가 났고

그래서 더 열심히 했죠, 그게 다예요 내 인생은

40주년이든 50주년이든 어려운 건 똑같아

매번 다른 산 오르는 것… 쉬운 적 한 번도 없어요

내 노래에 사람들이 환호하면 행복하고요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살았던 것 같아요"

조용필(68)은 "부족해, 연습이 아직도 부족해요"라고 했다. 5월 12일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리는 데뷔 50주년 콘서트 때문에 최근 매일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연습했다면서 그렇게 말했다. 23일 서울 서초동 그의 회사에서 조용필을 만났다. "평생 이렇게 연습했기 때문에 안 하면 불안하고 섭섭해요.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됩니다." 조용필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톡 쳤다.

18세부터 기타 메고 무대에 서온 이 남자는 출발 전 신발끈을 고쳐 묶고 또 묶는 마라토너 같았다. 그만큼 달렸으면 눈 감고도 길을 짚을 것이다. 눈을 반짝이며 그가 말했다. "쉬웠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매번 다른 산에 오르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기어올라야 하는 거라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했다.

'이만하면 됐다'가 없었던 50년

―40주년 때 "앞으로 몇 주년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겠다"고 했지요.

"좀 민망해요. 그런데 주위에서 가만 안 두더라고요. 50주년을 어떻게 그냥 넘어가냐는 거죠. 그래서 공연 준비를 하는데, 역시 쉽지 않더라고요. 속으로 '40주년이건 50주년이건 매번 똑같이 어렵구나' 했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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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0주년 공연을 한창 준비하고 있는 조용필은 숱한 공연을 했지만 “연습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행복이란 노래를 듣고 무심했던 관객들 표정이 바뀌는 걸 보는 것”이라고 했다. /조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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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 무대에 섰는데도 어려운가요.

"그럼요. 무슨 노래를 부를지 고르는 게 가장 어려워요. 공연 때마다 '그 노래 들으러 왔는데 왜 안 부르냐'고 하시니까. 고른 노래들을 매끈하게 연결하는 게 다음으로 까다롭고요. 템포·코드·구성을 생각해야 하니까요. 뮤지컬 기승전결 짜듯이 하려면 하나하나 다 불러보고 다 맞춰봐야 돼요."

―2005년 예술의전당에서 14일 연속 공연했었죠.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 당분간 전화 못 받는다. 공연장 찾아와도 못 만나준다. 그런 줄 알아라.' 그러고는 14일 내내 전화 꺼놓았어요. 공연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혼자 밥 먹고 자고 다음 날 또 뛰고 그랬죠."

―도 닦는 얘기 같은데요.

"나도 이런 내가 싫어요(웃음). 놀 것 다 놀고 일도 잘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그게 안 돼요. 요만한 것 하나도 틀어질까봐 불안해요. A부터 Z까지 다 맞춰져 있어야 돼요. 대인이 못 돼서 그런 거죠(웃음)."

3남4녀의 여섯째인 조용필은 초등학교 때 대학 다니던 형의 통기타로 기타 연주를 독학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들과 합주를 시작했다. 경동고 3학년 때 첫 밴드를 결성했고 1968년 '애트킨스'라는 밴드로 무대에 처음 섰다. 그때 보컬은 다른 사람이 맡았는데 그가 군대를 가는 바람에 조용필이 노래를 하게 됐다. "그 전까지는 '아우아우' 하고 화음만 넣어봤다"고 했다.

―우연히 노래를 하게 됐다고요?

"엉겁결에 보컬을 하게 돼서 얼마나 걱정이 많았다고…. 내 노래는 '땜빵'에서 시작된 거예요."

―노래 잘하는 피를 물려받았겠죠.

"가족 중 음악에 관심 있거나 잘하는 사람이 부모 형제는 물론이고 조부모·사촌까지 짚어봐도 없어요(웃음). 타고난 게 아니니 잘했을 리가 없죠. 처음엔 음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노래를 부르다 보니 호흡과 발성에 예민해졌어요. 음악을 너무 좋아했고 그래서 잘하고 싶었고 욕심만큼 못해서 화났고, 그래서 더 열심히 했죠. 돌아보면 그게 다예요(웃음)."

'땜빵 가수'에서 인기 가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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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발매된 조용필 정규 1집 앨범 재킷 사진.


조용필은 1972년 최초의 히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처음 녹음했다. 1976년엔 밴드 사운드를 입혀 다시 내놨다. 재일동포 모국 방문과 맞물려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땜빵 가수가 인기 가수 됐군요.

"운도 많이 따랐어요. 그때 대마초 사건 때문에 주춤하긴 했지만. 그땐 다들 뽕짝뽕짝 하는 리듬만 만들었는데 이 노래는 색달랐죠. 남들이 안 하는 걸 할 때 항상 신났던 것 같아요."

조용필 앨범을 1집부터 19집까지 듣다 보면 과연 한 사람이 불렀나 싶다. 국악의 내지름과 성악 발성, 판소리까지 오간다. 조용필은 "열심히 흉내 낸 결과"라고 했다.

―폭포 아래서 득음(得音)했다고들 말하잖아요.

"그건 소설이에요(웃음). 열심히는 했죠. 견고한 소리가 어울릴 것 같으면 그렇게 연습하고 헛소리(약한 소리)를 쓰고 싶으면 또 단련하고요. 남도 창(唱), 판소리에 빠졌을 땐 조상현 명창 따라다니면서 배웠어요."

―연습하니까 만족스러운 소리가 나오던가요.

"잘 안 돼요. 내 인생은 자책과 불만투성이예요. 요즘도 '아까 왜 그랬지', '왜 이것밖에 안 되지'를 반복해요. 팔자예요(웃음)."

한때 소문난 주당(酒黨)이었던 그는 이제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다음 날 몸을 감당하지 못하는 게 싫어서다. 거의 유일한 취미는 골프다. 그마저도 허리가 좋지 않아 예전처럼 자주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무대 위 짜릿한 순간을 위해 살았다"

조용필은 1986년 방송사에 "가요대상에서 날 빼달라"고 요청했다. 이어 기자들에게 "이제 TV에 그만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궁금했다. "인기를 얻을수록 별별 프로그램에 다 나와달라고 했어요. '전국노래자랑'에도 나와달라고 했죠.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이 부탁하니까 난감했어요. '이대로 하다간 노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송인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 그만두고 노래만 하고 싶었죠."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한 전국 공연 투어는 그러나 뜻밖에도 잘되지 않았다. 지방 도시에 가면 객석이 반도 차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때부터 조용필은 미국과 영국을 돌며 뮤지컬을 보기 시작했다. 무대장치와 조명, 연출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필은 한국 대중음악의 무대연출을 그렇게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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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정규 19집 ‘헬로’ 앨범 발매 후 공연하는 모습. /조용필팬클럽 ‘위대한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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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팬이 더 늘어났다면서요.

"신기했죠. 방송도 안 나가고 나이는 들어가는데 팬들은 불어났으니까요."

요즘도 그는 집 앞을 서성이는 팬들과 만나 인사하곤 한다. 조용필이 말했다. "팬들이 집 앞에 매일 있는 건 아녜요. 비 오거나 눈 오면 안 계실 때도 있어요."

―어딜 가나 쫓아다니면 괴로울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만 젊을 땐 팬들 때문에 주변의 미움을 받으면 어떡하나 걱정도 했어요. 시기받고 질투받는 게 무서웠으니까. 지금은 자유로워요. 내 음악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잖아요. 행복이란 게 단순해요. 무대에서 환호성 들을 때 행복해요. 내 노래 듣고 사람들이 웃으면 행복하고요. 이번에 평양 공연에서도 그랬어요. 목석 같던 사람들이 몇 곡 듣고 표정이 변하는 걸 봤어요. 결국 나는 그 순간을 위해 살았던 것 같아요."

―공연 없을 땐 시간을 어떻게 보내세요.

"운동해요. 음악 듣고요. 남들은 내 삶이 단순하다지만 사실은 다채로워요. 매일 음악을 찾아 들어도 아직 들을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요. 지겨울 새가 없죠."

―잠들 때 내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설레시나요.

조용필이 빙긋 웃었다. "그럼요. 오늘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하루 더 생기는 거잖아요. 제게 내일보다 좋은 건 없어요." 그의 50년은 내일을 위해 살았던 오늘들의 총합이었다.



[송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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