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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칼럼-김태훈의 불꽃] 'LG의 야생마' 이상훈전(傳) - <2> 야구가 즐거웠던 신길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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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칼럼-김태훈의 불꽃] 'LG의 야생마' 이상훈전(傳) - <2> 야구가 즐거웠던 신길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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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은 존재는 보통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없는 길을 가며 대신 꿈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다. 덕분에 우리는 안전한 일상 속에서 짜릿한 행복과 처절한 좌절 같은 인생의 재미를 맛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꽃 인생들을 오롯이 기억함으로써 그 빚을 갚아야 하지 않을까? 첫번째 불꽃 인생의 주인공은 엘지의 야생마 이상훈이다.

2. 야구가 즐거웠던 신길화랑



이듬해인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가 문을 열었다. 전년도 고교야구 붐은 고스란히 프로야구로 옮아갔다. 각 구단마다 어린이 회원을 대거 모집했다. 맞춤 유니폼과 팀 모자는 어린이들의 최신 패션이었다. 서울에서는 연고팀 MBC청룡 인기도 대단했지만 우승이 유력한, 머지 않아 서울연고팀이 될 오비베어스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소년이 선택한 팀은 오비베어스였다. 워낙 잘하기도 했고 아버지가 하는 일이 오비맥주 쪽과 연관돼 있기도 해서였다.

바야흐로 어린이 야구가 붐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기존 야구협회 산하에 학교야구팀을 중심으로 한 리틀야구팀들이 있었지만 외곽에도 ‘구락부 야구연맹’라는 이름으로 리틀야구팀이 속속 만들어졌다. 조상진도 단순 놀이가 아니라 구체적인 팀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팀이 바로 ‘신길화랑’이었다. 소년 이상훈은 이 팀에서 투수와 외야수를 번갈아 맡았다.


소년은 야구가 좋았다.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집에서 학교를 바라보다 담너머 주황색 신길화랑팀 모자가 얼핏 보이면 장비를 챙겨들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신길화랑팀의 장비는 운동장에서 가까운 소년 집에서 맡았다. 집 가까이 아파트 상가에 있는 이모네 가게 옆 빈공간을 야구팀이 빌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운동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짐을 들고 나가다 들켜서 친구들이 대신 가져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 번은 자기 몸보다 큰 짐을 지고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굴뚝 사다리를 타고 탈출한 적도 있다. 아파트 단지 뒷문이 잠겨 있을 땐 쇠창살 친 담너머로 짐을 던지고 어떻게 해서든 빈틈을 찾아내 운동장으로 내달렸다.

정식 팀으로 등록한 뒤에는 전용 연습장 욕심도 났다. 조상진 감독은 대방역 지하도를 지나 샛강을 건너 63빌딩 앞 공터, 지금은 주차장이 된 그곳 둔치를 연습장으로 지목했다. 멤버들은 그곳에서 풀을 뽑고 마운드를 높이며 차츰 훈련장으로 길들였다. 대방국민학교에서 출발한 신길화랑 유니폼들은 신길국민학교에서 합류한 친구들과 어울려 그 연습장으로 향했다.

협회 소속 리틀야구팀은 장충리틀야구장이 근거지였다면 구락부 연맹 소속 리틀야구팀은 면목동 빅보이클럽 구장이 근거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 없는 구장이었다. 야구장이 정사각형이어야 하는데 이곳은 직사각형이어서 오른쪽 담장이 보통 우익수 수비하는 위치까지 당겨져 있었다. 빅보이에서 경기가 있는 날 신길화랑팀은 각자 짐을 짊어지고 전철로 청량리역까지 간 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경기장에 도착해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유니폼을 입은 선수였기에 그 여정이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 미쉐린 대회 우승

신길화랑 시절은 소년에게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훈련을 제법 많이 했지만 정작 기억 속에는 훈련이 아닌 야구했던 장면들이 주로 남아 있다. 고된 훈련이 아닌 즐거운 야구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 소년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단서다.

고교야구가 최전성기일 때 야구를 접하고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신길화랑이라는 팀에 속했지만 소년은 박노준이나 박철순처럼 유명한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당연히 야구부가 있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고된 훈련을 참고 견뎌야 하는 야구를 소년은 하지 않은 것이다.

소년에게 야구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조상진 감독이 추구하는 야구가 그랬다. 그들은 훈련도 열심히 했지만 노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봄가을이 되면 산으로 들로 야유회를 떠났다. 계곡에서 도롱룡 알을 찾아 훑어먹기도 했고, 홀딱 벗고 수영도 했다. 버너와 반합을 챙겨들고 가 끓여먹었던 꽁치 김치찌개는 지금도 군침을 고이게 만든다.


경기에서 이기면 친구집 옥상에 모여 파티를 열었다. 기껏해야 탕수육에 짜장면, 그리고 군만두 정도였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지금이나 그때나 노는 데도 돈이 드는 시대였다. 그러나 조감독에게 신길화랑은 비즈니스가 아니었다. 회비가 있긴 해도 부담스런 정도는 아니었다. 조감독 스스로가 워낙 헌신적이었다.

창단한 그해에 서울에서 제법 큰 대회가 하나 마련됐다. 미쉐린타이어가 주최한 제1회 미쉐린기 리틀야구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장충동과 면목동에서 따로 운영되던 리틀야구 협회와 연맹이 한 자리에 모여 자웅을 겨루는 대회였다. 신길화랑은 이 대회를 겨냥해 전지훈련에 돌입했다. 장소는 전남 해남. 조감독 지인을 통해 여름방학 때 한 학교를 빌려 합숙에 들어갔다. 소년의 어머니를 비롯해 부모님 몇 분이 뒷바라지 차 동행했다. 물론 신길화랑답게 지옥훈련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널널하게 놀았다는 기억도 없다. 신길화랑은 하나가 돼 단체 생활을 했다. 소년은 야구의 첫발을 내디딘 신길화랑에서 한 시즌을 보내며 ‘팀’을 배운 것이다.


전지 훈련 덕분인지 탄탄한 팀워크 덕분인지 알 수 없지만 미쉐린 대회에서 신길화랑은 기라성 같은 리틀야구팀을 모두 격파하고 초대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소년은 이 대회에서 투수와 외야수, 그리고 1번 타자를 맡았다. 전문 야구인 출신이 아닌 감독이 이뤄낸 놀라운 성과였다.


드라마는 멋져도 현실은 냉정하다. 신길화랑의 처지가 그랬다. 기존의 리틀야구팀은 대개 상급학교와 연계돼 있었다. 당시 리틀 팀 중 명문으로 알려진 충암리틀은 충암중학교로, 중앙리틀은 중앙중학교로 진학하는 방식이었다. 야구인들끼리도 네트워크가 있어서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문화가 존재했다. 그러나 신길화랑은 감독부터가 아무 연줄이 없었다. 조감독은 그저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 시절에는 88올림픽을 앞두고 만들어진 ‘꿈나무 체육 특기자 선발’ 제도가 있었다. 조감독은 신길화랑에서 두 명의 선수를 뽑아 진선여고에서 열린 특기자 선발장으로 보냈다. 거기에 소년도 포함돼 있었고 다행히 둘 다 체육특기자로 중학교 진학에 성공한다.

◆ 고의 골절 소동

두 명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강남중학교를 선택했다. 이름은 강남이지만 대방동에 위치한 중학교였다. 이 학교 야구부는 주로 봉천초등학교 출신들이 진학했다. 60명 정도 되는 야구부원 중에 70% 이상이 그 학교 출신이었다. 소년과 친구 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아는 사이였다. 선후배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낙동강 오리알 같은 처지로 중학교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출신 탓도 있겠지만 소년은 신입생 시절 팀내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하루는 훈련을 빠트렸는데 이튿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졌다. 분위기도 신길화랑 때와는 무척 달랐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기합과 얼차려가 하루가 멀다하고 반복됐다. 더구나 신입생에게는 야구할 기회 자체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즈음 소년은 친구를 통해 조감독 소문을 듣게 된다. 입영 영장을 받은 상진 형이 날짜를 늦추려고 일부러 팔을 부러뜨렸다는 소식이었다. 팔을 부러뜨린 방법도 경악스러웠다. 신길화랑 출신 중학생들 몇명을 불러다가 팔뚝에 베니아판을 댄 채 야구 배트로 내려 치게 했다는 것이다. 소년은 직감했다. 상진형이 팔을 부러뜨린 이유가 단순히 군대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영장에 찍힌 입영 날짜는 체육 특기자 선발이 걸려 있는 민감한 시기였다. 신길화랑은 다른 리틀팀과 달리 연줄이 없었다. 조감독이 챙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진학과정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물론 조감독의 야구는 진학을 목표로 한 야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야구를 계속 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을 조감독은 중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다. 그 책임을 스스로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입영 날짜를 미루려고 백방으로 뛰어봤지만 방법을 찾지 못한 조감독이 극단적인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그 진심을 깊이 공감한 소년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집에 돌아와서 막무가내로 어머니를 졸랐다. 신길화랑에서 1년 더 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국제 기준으로 리틀야구 나이 제한이 우리나라 나이로 중학교 1학년까지이니 완전히 터무니 없는 요구는 아니었다. 소년은 그렇게라도 조감독을, 아니 상진형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중학교 야구부에 소속돼 엘리트 스포츠의 길로 들어선 마당에 강남중과 아무 연고도 없는 신길화랑에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조감독의 고의 골절 소동은 그러나 실패로 끝났다. 뻔히 사정을 아는 아이들이 얼마나 세게 내려칠 수 있었겠는가? 어정쩡하게 부상을 입은 조감독은 기브스를 한 채로 신체검사를 받고 영장에 나온 날짜에 맞춰 입대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소년의 야구 인생을 지탱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3편으로 이어집니다.

'LG의 야생마' 이상훈전(傳) - ① 소년, 야구를 만나다 다시보기


김태훈 작가 sports@st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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