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용은(가운데)이 PGA챔피언십 우승 직후 고개숙인 타이거 우즈(오른쪽) 앞에서 포효하고 있는 모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2009년 8월17일.
'바람의 아들' 양용은(46)은 PGA챔피언십에서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미국)를 격파해 파란을 일으켰다. 아시아 선수 최초의 메이저 챔프다. 최종일 챔피언조에서 동반플레이를 펼쳐 더욱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양용은은 우승 직후 태극기가 선명하게 새겨진 골프백을 번쩍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국내외 골프팬들은 "양용은이 대한민국을 들어올렸다"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양용은의 우승 세리머니는 클럽 수가 14개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더 많은 골프채가 들었다면 만만치 않은 무게로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1930년대 초반까지 선수들이 사용하는 클럽 수는 제한이 없었다. 마음내키는 대로 클럽을 백에 담았고, 기상 여건 등 상황에 따라 5~6개의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선수까지 나타났다.
1934년 스코틀랜드 프레스윅에서 열린 브리티시아마추어선수권에서 골프사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로슨 리틀(미국)은 무려 32개의 클럽으로 대회에 나섰다. 우드 5개와 아이언 17개, 퍼터 1개, 골프공 수십개, 대형우산 등이 가득했다. 영국 선수들이 10개 안팎의 클럽을 가진 것과 큰 대조를 보였다. 미국 선수들은 보통 20개 이상의 클럽을 투어백에 넣고 플레이 했다.
리틀의 캐디는 "클럽이 너무 많아 투어백이 무겁다"며 캐디피를 더 줄 것을 요청했다. 리틀은 고민 끝에 캐디의 의견을 받아들여 특별 요금을 지불했고, 우승했다. 하지만 "기량이 아닌 클럽의 덕택"이라는 조롱이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클럽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영국왕립골프협회(R&A)와 미국골프협회(USGA)는 1936년 클럽수를 최대 14개로 제한했다.
딱 14개로 정한 이유는 없다. 1더즌 12개에 퍼터 1개를 더해 13개로 하려다가 "13이라는 숫자는 불길하다"며 1개를 추가했다는 설이 있다. 리틀은 새로운 규칙이 제정되면서 18개의 클럽을 빼야 했다. 1936년 프로로 전향해 1940년 US오픈을 제패하는 등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통산 8승을 수확했고, 1980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다. 클럽 수는 줄었지만 실력은 여전했다.
KPGA 미디어팀장 zec9@kpga.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