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감독 이준익)의 배우 이제훈이 혹독한 고문 장면을 촬영한 후 실신했다고 밝혔다.
영화 ‘박열’은 1923년 도쿄에서 6000명의 조선인 학살을 은폐하려는 일제에 정면으로 맞선 조선 청년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의 실화를 그린다.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은 18세의 나이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 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의 와중에 일본국왕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돼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秋田)감옥에서 석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의옥살이를 치러야 했다.
해방 후 맥아더 정부에 의해 석방된 선생은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다. 북한에서 그는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아 군대축소와 국제적 중립국화에 노력했다. 1974년 1월 17일 서거해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영화 ‘박열’ 제작진에 따르면, 일본 제국의 한복판에서 항일 운동을 펼친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로 분한 이제훈은 완벽하게 캐릭터에 몰입해 뜨거운 열연을 펼쳤다.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을 자백하며 대역죄인으로 기소된 박열은 재판의 진행 과정에서 단식 투쟁까지 불사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이제훈은 실제로 촬영 내내 자발적 금식을 하며 연기에 진정성을 더했다고.
이제훈은 “촬영 전부터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만큼 절대 거짓으로 보이면 안 된다는 마음을 가졌다. 외면적은 것은 물론이고, 내면까지 ‘박열’ 그 자체가 되지 않으면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혹독한 고문 장면에서도 연기 투혼을 발휘했다. 파란만장했던 박열의 삶을 조금이나마 경험해보고자 따귀를 맞는 것은 기본이고, 곤봉 세례를 당하고, 음식물을 억지로 먹는 장면까지 실제로 연기한 이제훈은 이준익 감독과 스태프의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고문 장면 촬영이 끝난 후 걱정을 하는 제작진에게 오히려 웃어 보였던 이제훈은 “괜찮은 척 했었지만, 사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어지러웠고, 집에 돌아가서는 실신까지 했다”고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촬영 내내 몸을 아끼지 않는 이제훈의 열연에 대해 극찬을 보낸 이준익 감독은 “이제훈은 ’박열’이라는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매 순간 노심초사하고, 신중하고, 온몸을 던졌다. 맞는 장면을 찍거나 고문 당하는 장면에서도 울지 않던 이제훈이 마지막 촬영이 끝나고 눈물을 쏟는 걸 보고, 촬영 기간 내내 얼마나 자신을 다잡아 왔는지 느낄 수 있었고,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밝혔다.
외면은 물론 내면까지 캐릭터에 완벽 몰입한 이제훈의 혼신을 다한 열연을 엿볼 수 있는 ‘박열’은 6월 말 개봉한다.
동아닷컴 디지털뉴스팀 dn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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