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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PC방 창업 열풍 타고… 쑥쑥쑥 '용산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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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PC방 창업 열풍 타고… 쑥쑥쑥 '용산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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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초까지 전성기 구가
용산키즈 몰려들며 조립PC 불티 스타크래프트 나오며 고속 성장 가격 횡포 '용팔이'까지 등장도
IT 코리아 일등공신
PC 보급률 10여년새 3배 껑충 초고속인터넷 광속 확산 큰역할 복제SW 따른 백신 탄생 계기도
전자랜드를 중심으로 한 용산 전자상가는 1987년에 서울 종로 세운상가 상인들이옮겨 오면서 형성됐다. 특히 PC 관련업체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IT코리아를 만든 일등 공신이 됐다.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전자랜드를 중심으로 한 용산 전자상가는 1987년에 서울 종로 세운상가 상인들이옮겨 오면서 형성됐다. 특히 PC 관련업체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IT코리아를 만든 일등 공신이 됐다. 최흥수기자 choissoo@hk.co.kr


"제가 중ㆍ고등학교 때 용산전자상가를 밥 먹듯이 드나들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가 바랐던 대로 남들처럼 대학을 나와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있겠죠."

게임 벤처 '플라스콘'의 공동 대표인 차경묵(32)씨는 중학교 때인 1990년대 중반 처음 386 PC를 구입한 뒤로, 주말이면 뻔질나게 용산전자상가를 다녔던 '용산 키드'다. 곱상한 외모에 샌님 같았던 아들이 낑낑거리며 PC를 조립하는 모습은 기계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차씨는 고교 졸업 후 바로 꿈꾸던 게임개발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게임회사에서 나와 시도한 첫 창업은 실패했지만 2010년 두 번째 창업은 잘 진행돼 지난해 국내 최대게임사인 넥슨의 투자도 유치했다. 올 초 '체인팡'이라는 모바일 게임을 선보였고, 현재 차기 작품을 개발 중이다.

현재 인터넷ㆍ게임 등의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30~40대 중에는 이처럼 1990년대 학창시절 용산전자상가를 내 집처럼 들락거린 추억을 갖고 있는 '용산 키드'들이 많다.

인텔 286, 386, 486, 펜티엄 프로세서를 채택한 PC가 차례로 나오면서 개인용 PC가 급속도로 보급됐던 이 시기는 용산전자상가의 최전성기로 불린다. 대기업 PC보다 저렴하고 원하는 부품만 바꿔 마음대로 기능을 확장할 수 있는 조립PC가 용산을 통해 전국에 급속도로 보급됐다. 이로 인해 1988년까지만 해도 인구 100명 당 1.12대에 불과했던 PC보급률은 10년 만인 98년 말 17.86대로 늘게 됐다.

전화선을 통해 접속하는 PC통신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이 번성했던 90년대 초반, 용산 키드들은 PC통신 게시판에 올라오는 용산 업체들의 부품 가격을 적어 두었다가 주말이면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앞 지하보도(일명 '용산 굴다리')를 지나 나진상가, 선인상가 등을 배회하며 부품을 골랐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다 즐긴 게임팩을 중고로 되판 뒤 다시 중고 팩을 구입하기 위해 용산을 찾았다.


물론 잘 나가던 이 시절에도'용팔이'라 불리는 악덕업주들의 횡포는 악명이 높았다. 손님이 제품 가격을 물어보면 "얼마까지 알아보고 왔어요"라고 물어본 뒤 손님이 부른 가격보다 약간 낮은 가격에 높은 마진을 붙여 팔기 일쑤였다. 당시 PC통신 게시판에는 '용팔이에게 사기 당하지 않는 방법'과 관련된 게시물도 많았다.

복제품 문제도 심각했다. 신용산역 굴다리에는 복제품을 파는 상인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PC를 팔 때도 복제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파는 것이 당연시돼 있었다. 복제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지면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91년 처음으로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인 'V3'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용산전자상가의 호시절은 2000년대까지 계속된다. 1998년 출시된 게임 '스타크래프트'가 기폭제였다. 스타크래프트가 전국적 열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계 최초로 게임대회를 TV에서 중계하는 일까지 일어났고, 게임만 하는 신종 직업인 '프로게이머'가 생겼다. 스타크래프트 열풍은 98년 두루넷을 시작으로 99년 한국통신과 하나로통신이 초고속 인터넷을 서비스하면서 PC방 열풍으로 번졌다.


외환위기 직후 명예 퇴직자들이 너도나도 PC방 창업에 동참했고, 98년 처음 생기기 시작한 PC방 수는 2년 만에 무려 2만개를 돌파했다. PC방 한 곳당 평균 PC대수는 70개. 2년여 동안 PC방만으로 140만대의 PC 수요가 창출된 셈이다. 대부분 PC방은 값비싼 대기업 제품 대신 저렴하고 부품 교체가 용이한 조립PC를 선택했다. PC방 열풍의 최대 수혜자는 용산 상인들이었다.

이 기간 초고속 인터넷도 빛의 속도로 보급돼, 2002년 광대역통신망 가입자 수가 세계 최초로 1,000만명을 돌파했다. 이제 모든 가정에 PC가 보급된 것은 물론 인터넷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에 따라 인구 100명 당 PC 대수는 98년 17.86대에서 2001년 47.5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우리나라가 'IT 코리아' 'IT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가정마다, 사무실마다 보급된 PC였다. 빠르고 높은 PC보급률은 용산덕분에 가능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지금의 IT강국이 된 일등공신은 바로 용산상가다"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PC보급이 포화상태에 도달하면서 용산전자상가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특히 인터넷의 보급은 역설적으로 '정보의 평등'을 가져오면서 용산전자상가의 몰락을 재촉했다. 손님에게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라고 물어보며 '발품 팔기 아니면 바가지 쓰기'를 강요하던 업주들은 '다나와'라는 가격비교사이트에 부품 가격이 적나라하게 공개되면서 사실상 무장 해제 당했다.

용산전자상가 관계자는 "이제 손님들은 PC를 사러 더 이상 이 곳에 오지 않는다. 이 곳 업체들의 조립PC를 사면서도 직접 오기 보다는 온라인몰을 통해 구입하고 있다"고 달라진 풍경을 전했다.

최진주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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