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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反中시위로 중국인 최대 16명 사망說… 탈출 러시

조선일보 베이징=안용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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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反中시위로 중국인 최대 16명 사망說… 탈출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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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묵은 감정이 폭발
兩國, 한때 공산혁명 동지
호찌민 사망 이후 관계 악화… 1979년 결국 양국간 전쟁

中 최근 남중국해 석유시추… 베트남 '反中 감정' 불 질러
TV조선 화면 캡처

TV조선 화면 캡처


중국의 남중국해 석유 시추에 항의하는 베트남의 반중(反中) 시위가 폭동으로 번지면서, 양국 관계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14일 밤 베트남 중부 하띤성의 대만 포모사 플라스틱 제철소 건설 현장에 베트남 시위대가 들이닥쳐 직원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이 최소 1명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현지 언론들은 사망자 숫자를 최소 1명에서 최대 21명(중국인 16명, 베트남인 5명)으로 엇갈리게 보도하고 있다.

이 건설 현장에는 공동 시공사인 포스코건설과 삼성물산 소속 한국인들도 200여명 있었지만 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중 시위가 격화되자, 비행기나 배를 타고 베트남을 탈출하는 중국인도 급격히 늘고 있다. 베트남에서 인근 캄보디아로 떠나간 중국인은 600여명에 이른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이번 사태는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이후 35년 동안 쌓였던 베트남의 반중 감정이 폭발한 것이란 분석이 많다. 중국이 작년 10월 "남중국해 유전과 가스전을 공동 개발하자"고 약속해 놓고 일방적으로 남중국해로 석유시추선을 보낸 것이 도화선이 됐다는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은 20세기 초반 공산 혁명의 '동지'였다.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은 1920년대부터 저우언라이(周恩來), 덩샤오핑(鄧小平)과 친분을 쌓았다. 중국은 1950~1978년 미국·프랑스와 싸운 베트남 공산당에 200억달러에 이르는 무기와 생활 물자 등을 지원했다. 중국이 1965~1973년 베트남에 파병한 지원 부대만 32만명에 달했다.

하지만 1969년 호찌민 사망 이후 양국 관계는 금이 갔다. 덩샤오핑은 소련의 확장을 막고, 베트남의 야심을 꺾기 위해 1979년 2월 중국군 20만 명을 동원해 베트남을 침공했다.

1991년 중국과 베트남은 국교를 정상화했지만, 21세기 중국의 '해양 굴기(崛起·우뚝 섬)' 정책이 본격화하면서 다시 요동치고 있다. 남중국해의 시사(西沙·베트남명 호앙사) 군도가 충돌 지점이다. 베트남 해안에서 불과 167해리(309㎞) 떨어졌지만, 중국이 1974년 당시 월남과의 해전(海戰)에서 승리한 뒤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은 시사 군도 해역의 영유권을 서로 주장하며 자원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달 초 중국이 석유시추선을 설치한 곳도 이 해역이다. 베트남은 중국에 맞서 러시아·인도 등을 끌어들여 석유 탐사를 했다. 러시아제 전투기와 군함도 사들였다.

현재 중국 정부는 베트남의 반중 폭력 시위에 엄중히 항의하면서도 자제하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중국 관영 매체는 베트남의 반중 시위 보도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중국이 일본이나 필리핀과 충돌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은 "일본·필리핀은 미국과 군사 관계를 맺었지만, 베트남은 중국과 경제적 유대가 강하다"며 "중국은 베트남까지 완전한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안용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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