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화첩
2005년 10월 독일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조선 미술의 대가 겸재 정선의 희귀작 21점이 담긴 화첩(그림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 8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것. 독일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경북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 형식으로 사실상 돌려준 것이다.
그렇게 고국 땅에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이 일반에 공개됐다. 2월2일까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의 회화실’에서 화첩을 공개하는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시가 열린다. 화첩의 형태와 모양을 실물과 똑같이 재현한 영인(影印·원본을 사진 촬영해 복제하는 것) 본과 화첩을 돌려받게 된 과정과 의미를 담은 책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도 함께 출간됐다.
화첩은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 원장이 1925년 한국 방문 중 수집해 독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가 처음으로 화첩을 발견한 뒤 이를 바탕으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국내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그렇게 고국 땅에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이 일반에 공개됐다. 2월2일까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왕실의 회화실’에서 화첩을 공개하는 ‘고국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전시가 열린다. 화첩의 형태와 모양을 실물과 똑같이 재현한 영인(影印·원본을 사진 촬영해 복제하는 것) 본과 화첩을 돌려받게 된 과정과 의미를 담은 책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도 함께 출간됐다.
화첩은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 원장이 1925년 한국 방문 중 수집해 독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가 처음으로 화첩을 발견한 뒤 이를 바탕으로 논문을 발표하면서 국내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의 노력으로 2005년 10월 22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 형식으로 반환했다. 독일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 100주년을 기념한 선물이었다. 현재 화첩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기탁ㆍ보관 중이다.
‘겸재정선화첩’은 정선이 비단에 채색해 그린 그림 21점으로 구성된 책이다. 자연과 인물을 그린 그림, 옛날 고사에 등장하는 인물을 그린 상상도 등 다양한 형식의 그림이 함께 담겨있다. 정선의 다채로운 예술세계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매주 화요일 화첩을 넘기는 형식으로 전시한다. 21일간 매일 방문해야 원본 그림 21점을 모두 볼 수 있는 셈이다. 똑같이 복제해낸 영인본 그림 21점을 옆쪽에 병풍처럼 펼쳐 전체 작품도 한번에 볼 수 있다.
겸재정선화첩’은 두가지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우선 겸재가 개척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용어 풀이 참조) 화풍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해외에 흩어져 있는 한국문화재를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영구 대여방식이란 소유권은 원래 소장자(독일 수도원)에게 있되, 점유권은 우리가 가져 연구ㆍ전시를 자유롭게 하는 새로운 형식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활용홍보실 차미애 팀장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우리 문화재가 15만3000점에 이른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청소년들이 해외 반출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반드시 되찾아와야 한다는 의지를 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겸재정선화첩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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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금강내산전도
금강산의 세 구역(외금강ㆍ내금강ㆍ해금강) 가운데 내금강의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흙과 나무가 많은 토산과 바위로 이루어진 암산으로 나눠진다. 토산 부분은 ‘ㄴ’자 형태를 이루며 화면 왼쪽과 아랫 부분을 감싸고 있다. 나무가 울창한 토산은 어두운 녹색으로 표현했다. 암산의 화강암 봉우리는 힘차게 그은 먹 선으로 형태를 잡고 아랫 부분엔 녹색을, 윗 부분엔 흰색을 칠했다. 사찰과 암자의 건물에는 붉은색을 써서 화면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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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폭동도
내금강의 명소인 만폭동 근처 경관을 담은 진경산수화다. 화면 중앙의 바위 절벽(금강대) 아래 펼쳐진 너럭바위 양쪽에서 물줄기가 모여 연못을 이룬다. 금강대 뒤편으로 대소 향로봉이 위치하고, 오른쪽 법기봉 중턱에 구리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보덕굴이 보인다. 전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일부 풍경을 실제 거리보다 가까운 것처럼 당겨 그렸기 때문이다. 정선이 즐겨 사용했던 방식이라고 한다.
3. 구룡폭포
외금강의 구룡폭포와 구룡연 일대의 모습을 담은 진경산수화다. 가운데 좌우로 가파르게 솟은 암벽을 타고 내리꽂히는 폭포의 물줄기가 보인다. 떨어진 폭포수는 둥글게 파인 구룡연에 모였다가 다시 물줄기를 이뤄 흘러내린다. 정선은 자신이 현장에서 본 풍경 요소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고자 다른 시점으로 그렸다. 폭포와 암벽에는 바로 앞을 바라보는 듯한 시점을, 구룡연에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을 적용했다. 정선의 개성있는 붓놀림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4. 함흥본궁송도
태조 이성계(1335∼1408년, 재위 1392∼1398년)가 성장기를 보낸 함흥의 고향집에 손수 심었다고 전하는 소나무 세 그루를 클로즈업해 그린 작품이다. 소나무는 원래 여섯 그루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가 말라 죽었다고 한다. 화면은 담장 너머에 비스듬히 솟은 커다란 소나무 세 그루와 배경을 이루는 본궁 내 건물 지붕으로 채워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정선이 실제로 함흥을 방문하지 않고 이 작품을 그렸다는 것이다. 1756년 함흥에 다녀온 박사해(1711∼1778)가 그때까지 본궁을 방문한 적이 없는 정선에게 본궁송을 그려달라고 청했더니 자신의 설명만 듣고도 실제로 본 듯이 묘사해 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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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광정도
대동강변의 연광정이란 정자를 중심으로 평양성의 경관을 그린 작품이다. 윗부분 여백에 “해동 제일의 승경, 제일의 필력(海東第一勝 第一筆)”이라는 감상평이 달려 있다. 연광정은 1528년 평안감사 허굉(1471∼1529)이 덕암 위에 건립했고, 그 이후 평양뿐 아니라 평안도를 대표하는 명소로 각종 시문의 소재가 됐다. 정선은 연광정과 대동문에 초점을 맞춰 규모를 과장해 그리고 평양성 안팎의 지형은 세밀하게 그렸다. 높은 석주가 떠받치고 있는 연광정의 구조는 실제 모습과 다른데, 이는 정선이 평양에 가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그렸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6.고산방학도
하얗게 눈이 덮인 산 속에서 분홍빛 옷을 입은 선비가 흰 꽃이 피어난 매화나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겨있다. 하늘에서는 멀리 학 한 마리가 날아온다. 이것은 고사에 나오는 임포(林逋)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그는 중국의 오월이라는 나라의 백성이었다. 북송에 의해 오월이 망하자 절개를 지키면서 항주의 고산에 은거하며 지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키우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정선은 거칠게 표현한 바위를 앞 쪽에 배치하고 흰 눈이 잔뜩 덮인 먼 산을 배경으로 한 후 인물과 매화를 화사하게 표현해 그림의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7. 횡거관초도
푸른 잎이 무성한 파초 두 그루가 서 있고, 그 사이에 수염이 기다란 선비가 땅바닥에 앉아 있다. 사방으로 벌어진 넓은 파초잎은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선비는 빈 족자를 펼쳐 놓고 그 옆에 붓 한 자루와 붉은 벼루, 초록색 연적을 가지런히 놓은 채 먼 하늘을 쳐다보며 시상을 가다듬고 있다. 왼편으로는 구멍이 숭숭 뚫린 커다란 괴석이 서 있어 잘 꾸며진 정원 안의 장면인 것을 알려준다. 그림 속의 선비는 중국 북송의 학자인 장재(張載)이며, 횡거는 그의 호다. 위쪽 배경을 생략해 파초와 주인공을 돋보이도록 했으며, 산뜻한 색깔을 사용해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파초의 잎맥까지 정교하게 그렸다. 인물 묘사도 세밀한데, 얼굴에는 인자하고 덕망있는 학자의 풍모가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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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재그로 꺾인 흰색 돌난간이 그림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이를 경계로 아래쪽에는 네모반듯하게 구분된 약초밭이 있다. 자세히 보면 구역마다 각기 다른 종류의 약초가 자라고 있다. 분홍색 도포를 걸친 선비는 두 팔을 난간에 걸치고 모서리 장식에 턱을 괜 채로 엎드려 있다. 약초들이 푸릇푸릇 잘 자란 탓인지 흐뭇한 얼굴로 약초밭을 바라보는 중이다. 연두색 약초와 흰 돌난간, 회색 괴석과 푸른 나무에 둘러싸인 분홍빛 옷의 인물이 돋보인다. 그림 속의 선비는 송나라 때 재상이었던 사마광(司馬光)이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독락원(獨樂園)이라는 정원을 지어 한가로이 지냈는데, 한 쪽을 바둑판처럼 구획하고 각종 약초를 심었다고 한다.
◇정선(鄭敾, 1676~1759년)=호는 겸재(謙齋).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초기엔 중국화의 영향을 받았으나 뒤엔 독창적인 진경산수화법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선보였다. 기존의 문인화가 자연과 인물을 관념적인 선과 형태로 표현한 반면 진경산수화는 산천을 사실적인 구도와 필치로 치밀하고 자세하게 표현했다. 주요 작품으로 ‘금강전도’(국보 217호)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등이 있다. 안견, 장승업과 함께 조선 3대 화가로 꼽힌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우리나라의 강산을 우리 식으로 화폭에 담아낸 산수화다. 조선 후기에 유행했다. 중국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모방해 그리던 기존 산수화를 대신해 조선의 풍경을 화가가 직접 둘러보고 그린 것이다. 우리 땅에 대한 자부심과 민족 의식의 성장에 따라 등장했다.
‘겸재정선화첩’ 해외 반출에서 귀환까지
1925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원장, 5월 14일부터 9월 27일까지 한국 체류. 이 시기에 ‘겸재정선화첩’을 입수한 것으로 추정
1973년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 독일 쾰른대학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쓰던 중 『한국의 금강산에서』란 독일 책에 실린 3점의 정선 그림 사진 확인
1975년 유 교수, 한국 고미술품 애호가인 토마스 울브리히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을 방문해 화첩 발견
1976년 유 교수, 논문 통해 이 화첩을 한국 학계에 최초로 소개
1980년대 초 뮌헨 바이에른 주립고문서연구소에 근무하던 베네딕도회 수녀가 이 화첩의 보존처리를 자원. 이 화첩이 그 수녀에게 맡겨진 직후 그녀의 아파트 화재로 수녀는 사망하였으나, 다행히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던 화첩은 화를 면함
2005년 왜관수도원 선지훈 신부의 반환요청으로 오틸리엔수도원 예레미아스 슈뢰더 원장이 베네딕도회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반환 결정. 10월 22일 왜관수도원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반환.
2007년 4월 6일 왜관수도원 본관 건물 화재 때 불길 속에서 문서고에 보관중이던 화첩을 안전하게 구해냄
2010년 4월 30일 이후부터 현재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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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준·유준영·조인수·케이 E. 블랙·에카르트 데게·박정애·박은순·선지훈 저, 사회평론아카데미,260쪽, 2만5000원
겸재정선화첩이 독일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대한민국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쓴 책이다. 겸재정선화첩의 작품 21점과 작품해설도 담겨있다.
이에스더 기자 , 도움말·사진=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에스더 기자 etoile@joongang.co.kr
▶이에스더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com/worldblan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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