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에서 치료 중 별세했다. 사진은 1990년 6월 당시 지낸 평화민주당 의원 시절 이해찬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국회 본회의에서 대정부 질의를 펼치는 모습. 연합뉴스 |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지난 25일 영면에 들었다. 향년 74. 아직 창창하다 할 수밖에 없는 나이에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 이 부의장을 떠나보내는 현실이 황망하다. 그가 이역만리 베트남에서 공무를 수행하다 불귀의 객이 됐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을 더한다. 민주화 투사로서, 정치인으로서, 공직자로서 그의 평생은 공적 가치를 위한 헌신으로 점철돼 있다. 그런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조차 공적 임무 수행 도중 맞았다는 기막힌 운명 앞에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 수석부의장은 시대 변화와 더불어 다양한 정체성을 형성해왔지만, 그 출발은 투철한 민주화 운동가였다. 충남 청양 면장댁 셋째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진학 뒤 유신독재에 맞서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출소 뒤 광장서적과 돌베개출판사를 세워 민주주의 신념을 확산시키는 거점으로 키워냈다. 1980년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두번째 옥고를 치렀고, 1982년 석방된 뒤에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부위원장 등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으로 6월항쟁 성공에 기여했다.
1988년 정치 입문 뒤의 고인은 민주개혁진영의 집권과 선거 승리를 이끈 탁월한 정치 전략가로 기억된다. 1997년 김대중 캠프 부본부장, 2002년 노무현 캠프 기획본부장을 맡아 10년 연속 집권의 신기원을 여는 데 일조했고, 2020년엔 민주당 대표로서 21대 총선 대승을 이끌었다. 그는 독재정권에 뿌리가 닿는 거대 보수정당의 반민주적 행태에 비타협적으로 맞섰다. 일부에선 정치 대립이 격화한 책임의 일단을 그에게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이 민주적 경쟁의 틀과 원칙을 벗어난 적은 없다. 민주개혁진영의 정권 창출에 누구보다 앞장섰지만, 권력은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고 공공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았다.
고인은 장관과 총리를 지내며 공직자로서도 역량을 발휘했다. 특히 책임총리로서 노무현 정부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함으로써 민주개혁진영의 국정 시스템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진영 내부의 부당한 행태에는 서슬 퍼런 군기반장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파괴될 위기를 극복하고 네번째 민주개혁 정부가 들어선 지금 갑작스러운 그의 부음이 더욱 아쉽고 안타깝게 다가오는 건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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