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생애보고서 ③부부편 上]
‘위로받고 싶다’는 기대 vs “내 시간도 소중하다”는 현실
은퇴한 남편과 늘 바쁜 아내..'따로 또 같이' 늙어가는 법
[파이낸셜뉴스] 이른바 X세대 부모들에게 부부의 거리는 일종의 질서였다. 아버지는 앞서 걷고 어머니는 뒤따르던 시절, 손을 잡는 건 특별한 사건이었다. 시대가 변해 MZ세대들에게 애정 표현은 자유로워졌지만, 그 사이에 낀 X세대는 어딘가 어중간하다. 부모 세대처럼 거리를 두지도, MZ세대처럼 관계를 자유롭게 재설계하지도 못한 채 '함께 늙는 시간'의 입구에 도달했다.
지난 수십 년간 부부는 자녀를 키우고 부모를 돌보며 '같이 살되, 따로 버텨왔다'. 부모 역할에는 익숙해졌지만, 정작 '부부로 사는 법'은 연습할 기회가 없었다. 갈등은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졌고, 대화는 오직 생존과 과제 중심으로만 굳어졌다.
은퇴는 이 위태로운 균형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회사라는 완충 장치가 사라지는 순간, 부부는 처음으로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공유하는 관계가 된다. 자녀를 독립시키고(놓는 연습), 부모를 배웅하며(돌봄의 고민) 달려온 X세대에게 남은 마지막이자 가장 어려운 과제, 바로 부부다.
‘위로받고 싶다’는 기대 vs “내 시간도 소중하다”는 현실
은퇴한 남편과 늘 바쁜 아내..'따로 또 같이' 늙어가는 법
은퇴 후 부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각자의 장소에서 '간격'을 유지하며 살다가, 이젠 오롯이 둘이 마주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고 의구심이 아닌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은퇴자 X의 설계 |
아이들의 웃음만큼이나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장면이 있다.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이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동행'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미래는 아니다.
[파이낸셜뉴스] 이른바 X세대 부모들에게 부부의 거리는 일종의 질서였다. 아버지는 앞서 걷고 어머니는 뒤따르던 시절, 손을 잡는 건 특별한 사건이었다. 시대가 변해 MZ세대들에게 애정 표현은 자유로워졌지만, 그 사이에 낀 X세대는 어딘가 어중간하다. 부모 세대처럼 거리를 두지도, MZ세대처럼 관계를 자유롭게 재설계하지도 못한 채 '함께 늙는 시간'의 입구에 도달했다.
지난 수십 년간 부부는 자녀를 키우고 부모를 돌보며 '같이 살되, 따로 버텨왔다'. 부모 역할에는 익숙해졌지만, 정작 '부부로 사는 법'은 연습할 기회가 없었다. 갈등은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졌고, 대화는 오직 생존과 과제 중심으로만 굳어졌다.
은퇴는 이 위태로운 균형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회사라는 완충 장치가 사라지는 순간, 부부는 처음으로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공유하는 관계가 된다. 자녀를 독립시키고(놓는 연습), 부모를 배웅하며(돌봄의 고민) 달려온 X세대에게 남은 마지막이자 가장 어려운 과제, 바로 부부다.
이제부터 시작될 20년 이상의 시간을 어떻게 함께 살아낼 것인가.
사라진 회사라는 ‘완충 장치’
부부는 갑자기 서로를 '매일' 보게 됐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 회사는 부부 사이의 거대한 완충 장치였다.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 구조 속에서 사소한 갈등은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서로의 다름은 '바빠서'라는 이유로 덮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은퇴 전환기는 이 장치를 한순간에 걷어낸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기대수명은 남성 80.6세, 여성 86.4세다. 60세 전후에 은퇴한다고 가정하면, 부부는 최소 20년 이상을 더 함께 살아야 한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떤 리듬으로 함께 버티느냐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박모씨(56)는 퇴직 이후 재취업하기까지의 6개월을 이렇게 설명했다.
"큰 싸움은 없었다. 그런데 사소한 게 계속 걸렸다. 말투, TV 소리, 밥 먹는 시간까지. 예전엔 피곤해서 넘겼던 일들이 하루 종일 눈에 들어왔다."
엇갈리게 오는 은퇴 시기
‘소득’보다 먼저 어긋나는 것은 생활 리듬이다
현실에서 부부의 은퇴는 대부분 동시에 찾아오지 않는다. 한쪽은 정년이나 명예퇴직으로 조직을 떠나지만, 다른 한쪽은 계속 일하거나 새로운 활동을 확장한다. 이때 갈등의 핵심은 소득 유무보다 생활 리듬의 격차다.
서울 도봉구에 사는 최모씨(59)는 명예퇴직 뒤 운동과 동호회로 하루를 채운다. 반면 배우자는 본인의 일과 개인 일정을 유지하고 있다. 최씨는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각자 더 바빠졌다. 이제는 서로 하루를 자세히 묻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함께 있어서 멀어진 게 아니라, 각자 다른 속도로 전환기에 들어가면서 거리가 생긴 것이다. 은퇴한 쪽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느끼지만, 아직 일상을 유지하는 쪽은 ‘내 생활은 계속 굴러간다’고 느낀다. 같은 집, 다른 시간표가 시작된다.
같이 있고 싶어진 사람 vs 이미 일정이 꽉 찬 사람
먼저 일을 내려놓은 쪽은 자연스럽게 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어진다. 조직에서 빠져나오며 줄어든 인간관계의 빈자리를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채우려는 심리도 작용한다.
그러나 아직 일정과 역할이 유지되는 쪽에게 이 변화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남성들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글들이 많이 올라온다. 코너는 '남편 이야기'인데 제목은 '넘의 편', '남의 편'이 많이 보인다. 좋은 내용도 많이 있지만 '왜 그러는 걸까요' '넘의 편과 사이 좋으세요' 등의 제목만 봐서는 서운함, 짜증남이 느껴진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미선씨(59·가명)는 "남편이 은퇴 이후에 같이 점심 먹자, 산책하자고 한다"면서 "마음은 이해한다. 그런데 제 하루가 이미 꽉 차 있다. 일도 있고 약속도 있고. 누군가의 은퇴에 맞춰 제 속도를 조정해야 하는 느낌이 들 때가 가장 힘들다”고 토로했다.
은퇴한 쪽은 '이제 같이 좀 보내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내 일정은 왜 비워야 하지'가 된다. 갈등의 원인은 애정의 부족이 아니라 전환 속도와 삶을 준비해온 방식의 차이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현실감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의 한 장면. 퇴사 후 집에 돌아온 가장을 아내가 따뜻하게 안아주는 모습을 그렸다. 중년의 시청자들에게 '눈물 콧물 다 뺐다'는 후기가 쏟아진 '명장면'으로 꼽힌다. /jtbc 방송 화면 캡처 |
드라마나 예능은 종종 ‘퇴직한 배우자를 위로하는 배우자’의 장면을 자연스럽게 그린다. 최근 화제가 된 ‘서울 자가 김부장’ 같은 서사도 비슷한 기대를 만든다. '이제는 고생한 사람을 품어줘야 한다'는 감정적 합의다.
그러나 현실은 계산기부터 켜진다. 위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위로할 여력이 부족해서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김정희씨(58·가명)는 “25년간 일한 곳에서 나왔으니 힘들 것 같고 실제 힘들어 보인다"면서 "그런데 사실 불안하다. 교육비, 생활비 등 앞으로 들어갈 돈을 생각하면 원하는만큼 감정을 돌볼 여유가 없다. 미안하지만 어느 순간 계산기부터 꺼내게 된다”고 말했다.
'물음표 살인마?'된 남편
‘은퇴 남편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공식적인 의학 진단명은 아니다.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사회·심리학적 용어로, 남편이 은퇴한 이후 부부 관계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스트레스 양상을 묶어 부르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는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머물며 아내에게 일상·정서·생활 전반을 의존하고 그 과정에서 배우자가 피로감·스트레스·우울감을 느끼는 현상을 가리킨다. 다만 최근에는 그대로 쓰기보다 ‘은퇴 전환기 부부 갈등’ ‘은퇴 이후 역할 재조정 실패’ 등으로 풀어 설명하는 방식이 더 많이 쓰인다.
'어디 가는데?', '언제 들어와?', '밥은 언제 먹어?'
모든 은퇴자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많이 하는 질문들이다. 이래서 은퇴한 배우자를 '물음표 살인마'라고 다소 과격하게 표현한 인터넷상 글도 보인다. 물론 애정이 담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숫자가 말해주는 현실
수치로만 보면 은퇴 시기 즈음은 위기 상황이다. 대화는 줄고, 만족도는 낮아진다.
배우자와의 관계 만족도 /정기현 기자 |
성평등가족부 가족실태조사(2023)에 따르면 배우자 관계 만족도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낮아진다. 20대 91.7%였던 만족도는 50대 61.0%, 60대 59%로 떨어진다. 성별로는 남성 70.1%, 여성 61.9%로 격차도 존재한다.
하루 평균 대화시간 역시 줄어든다. 하루 1시간 이상 배우자와 대화한다는 비중은 40대 63.6%였지만 50대는 50%, 60대는 41.4%로 감소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도 ‘연결된 시간’이 자동으로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갈등이 커졌다는 체감은 숫자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60대 이상 이혼 건수는 지난 10년간 증가세를 보였다.
다만 이를 곧바로 ‘관계의 파국’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같은 조건에서도 어떤 부부는 이혼을 선택하고, 어떤 부부는 거리 조정과 규칙 설정을 통해 관계를 유지한다. 이혼은 결과 중 하나일 뿐, 그 이전에 조정의 구간이 길게 존재한다.
김윤정 법무법인 YK 가사·상속 전문변호사는 “은퇴 이후 부부 갈등이나 이혼이 갑자기 생긴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대부분은 혼인 기간 중 이미 존재하던 갈등이 자녀 양육과 직장 생활이라는 과제 속에서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자녀가 성장하고 커리어가 마무리되는 은퇴 시점이 오면 더 이상 참아야 할 이유가 사라지면서, 그동안 미뤄졌던 부부 관계의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배우자와의 하루 평균 대화 시간 /정기현 기자 |
관계의 끝이 아니라, 전환의 시작
은퇴 이후 부부 관계는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함께 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 각자 다른 은퇴를 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방치하면 거리가 벌어지고, 조율하면 새로운 균형이 만들어진다.
이서원 나우리가족상담소 소장(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은 "외국은 은퇴하면 부부관계가 좋아지지만 이전에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우리나라 부부들의 관계는 수직강하한다"면서 "은퇴 전부터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면서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고 의구심이 아닌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침마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집을 나서는 부부. 그 하루가 다시 만나는 지점은 저녁 식탁일 수도, 주말 하루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속도를 억지로 맞추는 게 아니라 서로의 속도를 인정하는 일이다.
<가족생애보고서 부부편> 다음 토요일에 계속
그렇다면 이 어긋남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조정할 수 있을까. 각방과 각자 생활, 돈 이야기의 방식, 역할 재분배, 대화 규칙 등 구체적인 조정법을 2편에서 다룬다.
그렇다면 이 어긋남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조정할 수 있을까. 각방과 각자 생활, 돈 이야기의 방식, 역할 재분배, 대화 규칙 등 구체적인 조정법을 2편에서 다룬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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