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을 잘 몰랐다. 축구, 팔레비, 호메이니 등 몇개의 단편적 사실들과 ‘핵’ ‘하마스’ ‘악의 축’ 같은 미국적 프레임이 인상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2008년 흑백의 강렬함과 소박함이 돋보이는 2D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를 만났다. 케첩 바른 감자칩과 아디다스 운동화를 좋아하고 이소룡을 동경하며, “왕에게 죽음을!”을 외치던 꼬마 ‘마르잔’. 그 천방지축 소녀의 성장기를 따라가면서 이란은 내게 ‘사람이 사는 땅’으로 실감되었다.
1979년의 이란 혁명은 부패한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그 자리엔 억압적인 신권 통치 체제가 들어섰다. 펑크록을 사랑하는 소녀 마르잔은 이제 차도르를 입어야 했고, 젊음과 자유가 거침없을수록 수많은 고통과 배반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할머니가 있었다. 55년 전 이혼을 감행하고, 브래지어 속에 재스민꽃을 품고 다니던 할머니는, 비겁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한 손녀에게 호통치며 말한다. “방법은 있어. 방법은 항상 있는 거야.” 이후 이란은 나에게, 유머와 낙관, 정치적 단호함을 동시에 지닌 할머니들이 딸, 손녀와 폭력적인 역사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계로 남았다.
2022년 가을, 당시 22세의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부적절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뒤 일주일 만에 의문사했다. 당국의 발표는 심장마비였다. “‘탁’ 하고 쳤더니 ‘억’ 하고 죽었다”는 이 해명에 분노한 수많은 여성이 장례식에서 히잡을 벗어 던지며 “잔, 젠데기, 아자디(여성, 생명, 자유)”를 외쳤다. 그 시위에서 17세의 한 소녀가 질문한다. “무엇을 입을지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요? 우리의 머리카락이 그렇게도 치명적인가요?”
사실 코란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히잡은 1970년대 유신정권이 미풍양속의 이름으로 미니스커트 단속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과 전통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의 문제다. 주디스 버틀러가 지적하듯,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권위주의적 권력은 규범을 가시화하고, 위반을 처벌하며, 사회 전반에 공포를 확산시킨다. 따라서 젠더폭력은 여성 개인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보내는 정치적 메시지다. 그래서 젠더폭력에 대한 저항은 언제나 ‘여성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향한 가장 오래된 투쟁이다.
2025년 12월 말, 경제 붕괴에 항의하는 바자르 상인들로부터 다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1979년 이후 최악의 유혈 사태”가 초래되었다고 한다. 망명한 여성들이 최고지도자의 사진을 불태우고, 축구 스타들이 골 세리머니를 거부하며 ‘침묵의 저항’을 잇고 있지만, 인터넷이 차단되고 모든 메신저가 통제된 상황에서 내부의 진실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이 와중에 팔레비 왕조의 후손과 미국이 각자 대안을 자처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란 민중은 스스로를 위해 투쟁한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13번 체포되고, 31년의 징역형과 154대의 채찍형을 당한 나르게스 모하마디가 있다. 202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녀는 악명 높은 테헤란 에빈 감옥에 갇혀서도 다른 정치범 여성들과 연대해 구호를 외치고, 성폭력과 백색고문의 실태를 폭로해왔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말하는 몸’ ‘기록하는 증언’을 조직해내는 그녀의 존재는, 마치 스크린 속 마르잔이 현실로 걸어 나와 “방법은 항상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듯하다. 그녀 역시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거리에서 춤추기 위하여,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을 위하여.” 2022년 시위 당시 만들어진 노래 ‘바라예(Baraye·~을 위하여)’의 가사다. 밴드 ‘콜드플레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공연 때 이 노래를 부르며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란의 모든 용감한 젊은이들에게 우리의 사랑과 지지를 온 마음을 다해 보낸다”고 말했다. 나는 이란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 속 보리수 씨앗처럼 폭압적인 권력을 파괴할 씨앗이 된 마르잔, 마흐사, 나르게스를 기억한다. 그리고 마음만은 콜드플레이 못지않은 간절함으로 지금 투쟁 중인 이란의 모든 시민에게 사랑과 지지를 보낸다. 잔, 젠데기, 아자디!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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