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애하는 도적님아’ 1회. 백정 탈을 쓰고 의적 홍길동으로 활약하는 홍은조와, 탐정 놀이를 하다가 그를 쫓는 도월대군. 한국방송 제공 |
‘이강달’은 남녀 간 계급 차이에서 출발하지만, 박달이가 진짜 세자빈으로 밝혀지면서 계급 차이는 원인 무효화된다. ‘시크릿 가든’은 신데렐라 이야기의 불가능성을 대사로 읊으며, 신데렐라 이야기를 서사로 엮은 기묘한 드라마다. 그 역설의 지렛대로 영혼 체인지가 쓰였다. 반면 ‘은애도’는 해소되지 않는 계급 모순과, 홍길동과 중종반정이라는 혁명의 서사를 품는다.
‘은애하는 도적님아’는 ‘여자 홍길동’과 대군 사이의 로맨스를 그린 사극으로, 영혼 체인지가 등장한다. 얼마 전 종영한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도 부보상과 왕세자 사이 로맨스로 영혼 체인지가 강력한 설정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설정의 두 드라마가 등장한 것이 눈길을 끈다.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 2회. 등짐장수 박달이가 총에 맞은 세자 이강을 구하고, 함께 말을 타고 한양으로 오는 장면. 문화방송 제공 |
‘영혼 체인지’ 침투한 사극들
‘시크릿 가든’(2010), ‘빅’(2012), ‘브랜딩 인 성수동’(2024) 등 한국 로맨틱 코미디(로코)에서 영혼 체인지는 흔하다. 이유는 역지사지를 형상화하기에 가장 좋기 때문이다. 장르적으로는 강력한 코미디 장치다. 남녀가 바뀌면서 하는 행동이 기묘한 퀴어성을 발현하며, 성별 질서를 무너뜨리는 쾌감과 카타르시스가 상당하다. 서로의 성별과 개성을 흉내 내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맛도 쏠쏠하다. 비밀을 공유하는 두 사람이 강제로 붙어 다니며 빚어내는 소동극도 웃음과 긴장을 자아낸다. 그뿐 아니다. 잘 쓴 영혼 체인지 설정은 인간의 본질이나 사랑이 무엇인가 같은 철학적인 주제도 녹일 수 있다.
사극에 쓰면 어떨까. 성 역할이나 신분에 따른 격차가 훨씬 큰 시대를 배경으로 남녀 간 영혼 체인지가 일어나면 역지사지 효과는 물론이고, 희극적 장치는 더 증폭된다. 현대극에서 주로 쓰던 영혼 체인지 설정을 사극에 도입한 것은 ‘철인왕후’(2020)부터다. 그 후 ‘환혼’(2022)에 이어, 최근 ‘이강달’(이강에는 달이 흐른다), ‘은애도’(은애하는 도적님아)로 이어진다. ‘철인왕후’는 현대 남성과 조선시대 중전의 영혼이 바뀌는 것으로, 타임워프 설정을 지닌다. ‘환혼’은 최고 살수의 영혼이 하녀의 몸에 갇히고, 도련님과 사제 관계이자 연인으로 발전하는 판타지 무협 사극이다.
‘철인왕후’ 포스터. 영혼 체인지를 사극에 적용한 첫 작품으로, 중국 웹 드라마가 원작이다. 티브이엔 제공 |
영혼 체인지 로맨스 사극의 출현은 중국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 중국에는 ‘은차’(2023) ‘대왕불이’(2017) 등 영혼 체인지 사극이 많다. ‘철인왕후’의 원작은 중국의 ‘태자비승직기’(2015)였다. ‘환혼’은 중국 원작이 아니지만, 중국 드라마 장르 중 ‘선협물’의 판타지적 세계관을 차용한다. 가상 국가와 문파를 배경 삼아, 영혼 체인지가 오랜 수련으로 연마하는 술법이라고 밑밥을 깐다. 이게 중국 ‘선협물’식 설정이다. ‘환혼’은 방대한 중국 ‘선협물’의 구조를 압축해내면서, 한국 로코의 장점을 살렸다. 즉 하녀인 여주인공이 도련님인 남주인공을 가르치는 역전된 사제 관계로 평등한 로맨스를 빚어냈다. 여기에 코미디를 가미하고, 절제된 미감과 질 높은 컴퓨터그래픽(CG)으로 세련된 판타지를 얹었다.
그런데 중국에는 왜 영혼 체인지 사극이 많을까. 중국 드라마의 원천인 웹 소설 시장에는 타임슬립과 빙의가 거대한 장르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무수한 사극과 현대극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2011년 중국 당국에서 타임슬립 금지 조처를 내렸다. “진지한 역사를 가볍게 다루고, 봉건 미신을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이후 제작사들이 빙의로 몰려가면서, 영혼 체인지물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태자비승직기’는 우회로를 택한 하이브리드 결과물이었다.
‘커플 쌍방 영혼 체인지’로 본격화
‘철인왕후’와 ‘환혼’은 로맨스 당사자 간 영혼 체인지가 아니었다. ‘이강달’과 ‘은애도’는 신분 차이가 나는 남녀 사이 영혼 체인지를 통해 로맨스가 완성되는 본격 영혼 체인지 로맨스 사극이다. 두 작품은 유사성이 많다. 남주인공은 세자이거나 대군으로, 왕의 곁에서 능력을 감춘 채 살아간다. 여주인공들은 미천한 신분이나 행동반경이 넓고, 이타적이며, 비밀을 지닌다. ‘이강달’의 박달이는 팔도를 누비는 등짐장수로, 5년 전 사고로 기억을 잃고 자신을 도망 노비로 알고 있지만, 실은 ‘죽은 것으로 알려진’ 세자빈이다. ‘은애도’의 홍은조는 몰락한 가문의 얼녀로, 낮에는 의녀이고 밤에는 의적이다.
‘이강달’과 ‘은애도’는 차이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영혼 체인지를 위한 장치다. ‘이강달’은 시작부터 천상계 같은 꽃밭에서 도인이 등장하여 ‘홍연’ 운운하며 판타지적 세계관을 설파한다. 영혼이 바뀌기 위한 장치로 피, 물, 흉터를 동원한다. 이런 장황한 서두는 중국 드라마의 영향을 드러낸다. 주제도 ‘홍연’을 강조하며, ‘죽음을 넘어서는 이성애의 승리’를 찬양한다. 반면에 ‘은애도’에서 영혼 체인지 설정은 동자승이 각각 나눠준 매듭 팔찌로 갈음한다. ‘은애도’의 단출한 설정은 현대물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에 가깝다. 이를테면 ‘시크릿 가든’에서 각자 마신 약술로 영혼 체인지가 일어났다는 가벼운 설정과 흡사하다.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 1회. 프롤로그로 삼신할미가 보낸 명부를 전달받은 월하노인이 인연화를 꽃피운다. 문화방송 제공 |
‘시크릿 가든’보다 진보한 ‘은애도’
‘시크릿 가든’은 ‘오만하고 까칠한 재벌 3세 남성’과 ‘거친 액션을 펼치는 가난한 스턴트우먼’의 영혼 체인지 로맨스다. ‘은애도’는 이 인물들을 조선시대로 번역한 듯하다. 남녀 주인공은 물론이고, 남자의 어머니 성격도 비슷해 보인다. 심지어 영혼 체인지 직후 빚어지는 화장실 소동이나 옷 갈아입기 소동도 유사하게 삽입되어 있다.
‘시크릿 가든’ 1회. 재벌 3세 김주원. 오만과 독설로 사랑에 빠진 것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츤데레’ 캐릭터로 인기를 모았지만,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상대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태도가 몹시 거슬린다. 에스비에스 제공 |
‘시크릿 가든’과 ‘은애도’에서 여주인공은 처음에 옷차림(반짝이 트레이닝복과 무명옷) 때문에 남주인공 신분을 오인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태도에 당혹감을 느끼다가 성큼 매료된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사랑을 강하게 부인한다. ‘은애도’는 ‘시크릿 가든’과 유사한 감정의 흐름을 탄다. 그런데 둘을 비교하면, ‘은애도’가 신분과 젠더 격차가 훨씬 심한 조선시대를 그리고 있음에도, 홍은조를 더 도발적으로 그렸다. 첫 만남부터 남루한 차림새로 양반과 시비가 붙은 도월대군 앞에 홍은조가 갑자기 나타나 “정신 나간 우리 집 노비”라며 그의 손을 잡아끈다. 두번째 만남에서는 무심코 기다리던 도월대군에게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다. 도월대군도 ‘시크릿 가든’ 김주원에 견줘 여자에게 덜 오만하다. 도월대군은 시혜적인 강요나 독설을 내뱉지 않는다. 여자의 일터에 허락 없이 나타나지도 않으며,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한다. 길라임이 활동적인 스턴트우먼임에도 김주원의 무례를 자주 참았던 것과 달리, 홍은조는 상대가 대군임을 알고 나서도 권력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이는 지난 15년간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페미니즘 열풍이 드라마에 투영된 결과이다.
‘은애하는 도적님아’ 1회. 집안을 위해 70대 노인과 혼인하게 되었음을 안 홍은조는 길 위에서 도월대군을 발견하자 뒤숭숭한 마음에 냅다 입을 맞춘다. 한국방송 제공 |
‘이강달’은 남녀 계급 차이에서 출발하지만, 박달이가 진짜 세자빈이었음이 밝혀지면서 계급 차이는 원인 무효화된다. 사건의 본질은 궁중 암투 복수극이고, 주제는 죽음을 이기는 사랑이다. ‘시크릿 가든’은 신데렐라 이야기의 불가능성을 대사로 읊으며, 신데렐라 이야기를 서사로 엮은 기묘한 드라마다. 그 역설의 지렛대로 영혼 체인지가 쓰였는데, 영혼 체인지의 동력은 죽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반면 ‘은애도’는 해소되지 않는 계급 모순을 품고 있으며, 홍길동과 중종반정이라는 삼켜지지 않는 혁명의 서사를 내포한다. 게다가 청상과부 홍길동이라니, ‘밤에 피는 꽃’에 이어 계급 모순을 넘어 젠더 모순을 포괄한다. 초반에 도월대군이 홍길동에게 구휼을 위한 좀도둑질은 허용하나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짓은 용납하지 않겠노라 당부한다. 그러나 6회에서 홍길동을 놓아준 행위로 도월대군도 위기를 맞는다. 결국 ‘대군이 허락한 의적질’이란 형용모순은 홍길동에게나 도월대군에게나 쳐부수어야 할 족쇄가 된다.
두 사람은 의적의 방식이든, 반정의 형태로든, 세상을 엎을 잠재성을 지닌 존재다. 이들의 영혼 체인지는 공조와 연대를 불러온다. 어쩌면 드라마는 역사 속 중종반정과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줄지 모른다. 즉 궁중 쿠데타로 이후 공신들의 득세와 왕권 약화로 이어진 실제 역사의 길이 아니라, 도월대군이 홍은조의 몸으로 억압과 차별을 겪으며 혁명의 당위성을 깨닫고, 홍은조가 대군의 몸으로 권력 구조를 익히고 실력과 명분을 쌓은 뒤, 이들이 원팀으로 ‘백성의 마음을 훔치는 도적’이 된다면, 홍길동의 사상이 담긴 혁명도 가능할 것이다. 드라마는 명나라가 있던 조선 전기를 그리면서, 고증에 맞지 않는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실제와는 다른 대안 역사의 길을 보여주겠다는 표식으로 읽힌다.
내시로 위장한 여성과 왕세자가 혁명을 꿈꾸었던 ‘구르미 그린 달빛’(2016), 오빠 대신 왕좌에 오른 여성을 그렸던 ‘연모’(2021), 미래에서 온 중전이 철종과 함께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앞당겼던 ‘철인왕후’(2020)처럼 전복적이고 해방적인 상상이 펼쳐지길 바란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꿈꿀 수 있는 능력이다.
황진미 |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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