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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소멸돼도 쇼는 계속돼야 한다…연극 ‘더 드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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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소멸돼도 쇼는 계속돼야 한다…연극 ‘더 드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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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더 드레서’. 나인스토리 제공

연극 ‘더 드레서’. 나인스토리 제공


“첫 대사가 뭐였지?” “프랑스 왕과 버건디 공을 모셔 오게!” “다음 대사는 뭐지?” “다음 대사는….” “말하지 말라고 했지. 조용히 하라구.”



227번째 ‘리어왕’ 무대를 앞두고 노배우는 첫 대사부터 기억이 안 나 반복해 묻고, 대답할라치면 조용히 하라고 역정을 낸다. 육체도 정신도 쇠해가는 노배우의 변덕을 끈질긴 다정함으로 달래는 노먼은 ‘선생님’(sir)의 무대의상을 입히고 벗기면서 30년 동안 수족처럼 선생님을 보살펴온 의상 담당 ‘드레서’다. 1942년 영국, 수시로 폭음이 터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무대에 올리려는 이들의 분투는 선생님의 혼란으로 인해 점점 더 위태로워진다.



장유정 연출의 네번째 시즌(4연)으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더 드레서’가 이전 시즌과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캐스팅이다. 최근 무대에서의 활약이 눈부신 배우 박근형과 정동환이 노배우인 선생님을 맡았고 전 시즌에서 선생님을 연기했던 송승환이 후배 오만석과 함께 노먼을 맡았다. 선생님은 연기자 연배가 70~80대로 올라가면서 말하자면 더 선생님에 더 가까워졌고, 요 몇년 새 시력이 급속도로 나빠진 송승환의 자리 이동은 신선한 파격이다.



박근형·정동환이라는 대배우이자 노배우가 연기하는 선생님은 인간의 유한한 삶과 인간이 끝내 따라잡을 수 없는 예술의 영속성에 대한 쓰라린 통찰을 보여준다. 늙고 주름진 입에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대사들이 뒤죽박죽되어 나오는 선생님은 이제는 물러날 때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노먼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멈출 줄 모르는 그의 의지를 이기심이라고 비난하지만, 세간의 냉정한 평가와 공격의 전장에서 “버티고 살아내온” 그에게 예술은 보잘것없는 삶이 감히 멈춰 세울 수 없는 것이다. 분장을 하면서 “옛날에는 주름과 검버섯을 다 그렸는데, 이제는 좀 덧칠만 하면 되네” 하고 자조하는 85살 박근형의 연기는 순간순간 캐릭터와 배우의 인간적 모습이 공명하면서 큰 울림을 준다.



생의 빛이 다해가는 선생님이 주는 묵직한 삶의 통찰 반대편에는 무언가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의 비애가 할퀴듯 파고든다. 노먼은 한때 자신감 넘쳤고 여전히 오만한 예술가의 까탈스러움을 엄마처럼, 하인처럼 달래주고 비위 맞춘다. 30년 세월을 선생님의 그림자로 살면서도 아무런 불만이 없던 그는 선생님이 쓰기 시작한 자서전 머리말의 길고 긴 감사 인사에 자신이 빠진 걸 알고 배신감에 절망한다. 미친 듯이 분노하고 원망하지만 결국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선생님의 옷깃을 쓰다듬는 송승환의 연기는 끝내 잊힐 걸 알면서도 예술을 사랑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비통한 운명을 절절하게 풀어낸다.



무대는 소파와 분장용 책상, 옷걸이가 있는 대기실과 공연 무대임을 알려주는 커튼뿐으로 간소하다. 수수한 무대에서 배우들의 연기 힘만으로 관객의 마음에 크나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아름답고 가슴 뭉클한 작품이다. 3월1일까지.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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