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가문에서 가족으로'
이탈리아 토스카나 일대 시에나 대성당 전경 |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인간은 영생을 꿈꾸지만, 생명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세포 분열 과정에서 유전자(DNA)가 복제되는데, 나이가 들수록 오작동 확률은 높아간다. 결국 인간은 유전자 복제 오류와 손상이 누적되면서 암과 같은 질병에 걸려 죽는다. 그리스 비극에 나오는 상투적 표현처럼 '필멸'은 인간의 숙명이다.
신체적 한계 탓에 삶을 이어갈 수 없는 인간은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 자손에게 DNA를 남겨줌으로써 영생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이런 메커니즘에 대해 영국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주저 '이기적 유전자'에서 우리 몸은 유전자의 생존과 복제를 운반하는 도구에 가깝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결국 DNA가 진짜고, 육신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얘기다.
재산상속 |
그러나 인간이 후손에게 유전자만 물려준 건 아니었다. 재산도 줬다. 17~18세기 유럽에선 귀족들이 재정적으로 쇠퇴하고 몰락하는 상황을 막으려 했다. 이를 위해 당대 귀족들은 가문의 재산을 가능한 한 하나의 덩어리로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유산을 나눠주는 분할 상속보단 한 명에게 몰아주는 일괄 상속이 관행으로 발전했다.
당대 유럽에서 유행한 특유의 문화가 이런 상속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어 라틴어에 심취해 있던 당시 유럽인들은 오랜 기간 지속된 것일수록 가치가 커진다고 믿었다. 또한 지배계층이 귀족 신분과 평민을 엄격히 구분함으로써 신분적 폐쇄성을 강화해 나가던 시대적 분위기도 상속제도에 영향을 줬다.
이탈리아 누오보성 |
이에 따라 가문이 오래 번성하기 위해선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게 귀족들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신분적 폐쇄성을 유지하려면 자원을 한명에게 몰아주는 방식이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냉혹했다. 장남이 주로 재산을 전부 물려받고, 차남 이하는 신부가 되거나 귀부인을 수행하는 남성인 '치치스베오'가 됐다. 혹은 독신으로 남아 자유연애에 몰두했다. 가령, 토스카나의 귀족들은 유산이 흩어지는 걸 피하기 위해 "차남 이하의 아들들이 결혼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여성들은 주로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야 했다. 네 자매가 모두 수도원에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글항아리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
(글항아리)는 로베르토 비조키 이탈리아 피사대 사학과 교수가 17~18세기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한 귀족 가문의 족보를 들춰내 상속제도를 치밀하게 탐구한 연구서다. 저자는 브라치 캄비나 가문을 창건한 레오나르도부터 그의 후손 아타나시오까지의 역사를 다뤘다. 저자는 토지의 재산 매입과 관련된 문서뿐 아니라 일기와 편지, 사적인 메모 등 가문에서 생산되는 모든 기록을 참고해 책을 썼다.
책은 가문 중심에서 개인 중심 문화로 바뀌는 순간을 묘사한다. 저자는 가문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을 계몽주의가 야기한 거대한 사상적 변화, 즉 '가문이 아닌 개인 중심으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결부시킨다. 예컨대 레오나르도의 후손 루소리오는 차남이었지만 결혼했고, 유산을 일부 받았으며 이를 아내에게 모두 물려줬다. 책은 이 같은 유산상속의 변화와 계몽주의가 시대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며 '가문' 중심에서 '가족' 중심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세밀히 포착한다.
임동현 옮김. 352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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