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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정당방위

조선일보 최원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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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정당방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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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피’는 화투 놀이 용어이기도 하지만 수사기관에선 다른 의미로 쓰인다. 폭행 사건 양쪽 당사자를 다 입건할 때 ‘쌍피’ 사건이라고 한다. 법률 용어는 아닌데 실무에선 ‘쌍방 피해’의 줄임말로 쓴다. 수사기관 입장에선 잘잘못이나 정당방위를 가리지 않고 사건을 간단히 처리할 수 있으니 ‘쌍피’ 처리를 선호했다. 그 경우 피해자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먼저 폭행당해 싸움이 벌어져도 맞는 게 상책”이란 말까지 나왔다.

▶이런 상황은 법원이 정당방위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것과 무관치 않다. 2014년 집에 침입한 도둑을 집주인이 빨래건조대로 때려 뇌사 상태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는데 법원은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상대가 공격을 멈췄는데 과도하게 반격했다는 이유였다. 1964년 성추행범의 혀를 깨물어 일부를 절단한 최말자씨가 상해죄로 처벌받은 뒤 재심을 통해 지난해 정당방위로 인정받기까지 61년4개월이 걸렸다.

▶여기엔 모호한 법 조항 탓도 있다. 형법은 ‘현재의 부당한 침해로부터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해 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벌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당장 벌어지는 ‘현재의’ 침해 행위에 대해서만, 그리고 그 수단도 ‘상당성’을 갖춰야만 정당방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묻지마 살인 등 강력 범죄가 횡행하는 요즘이다. 그 상황에서 방어의 상당성을 따지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

▶미국은 정당방위를 폭넓게 인정한다. 2012년 집 문을 부수고 들어온 남성을 총으로 쏴 숨지게 한 여성에게 경찰은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이런 배경엔 ‘캐슬 독트린(Castle Doctrine)’과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Stand Your Ground)’라는 정당방위 관련 원칙이 있다. 캐슬 독트린은 ‘집은 성(城)’이란 논리에 따라 집에서 침입자를 만나면 무력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이 원칙을 공공장소 전반으로 확장한 법 개념이 스탠드 유어 그라운드이다. 플로리다 등 30여 주가 이 법을 채택하고 있다.

▶최근 아이돌 그룹 출신 배우가 집에 침입한 강도를 제압했다가 이 강도에게 살인 미수 혐의로 역고소를 당했는데 경찰이 정당방위로 판단했다고 한다. 강도가 고소까지 한 걸 보면 그만큼 정당방위가 그동안 잘 인정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고 진짜 피해자가 처벌받는다면 형사사법의 완전 실패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정당방위 인정 범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최원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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