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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상의 하이퍼 파라미터]왜 열심히 일하느냐 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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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상의 하이퍼 파라미터]왜 열심히 일하느냐 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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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컴퓨터 잡지를 즐겨봤다. 어느 날 반팔 티셔츠, 반바지에 ‘쓰레빠’를 꿰고 사방에 뭔가 덕지덕지 붙은 지저분해 보이는 사무실에 출근해 게임을 만드는 이들의 인터뷰를 발견했다. 문화 충격이었다. 그들은 나의 우상이 됐다. 고작해야 일하는 모습인데 왜 그리 가슴이 쿵쿵 뛰던지. 게임을 만들겠다고 밤새 한 줄 한 줄 명령어를 입력하던 시절이었기에, 언젠가 그 대열에 끼고 싶었다. 다큐멘터리 <세이브 더 게임>을 보니 그 옛날 우상들도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게임 제작은 그들에게 일 이상의 무엇이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이원술 손노리 대표는 당시 폐결핵이 걸릴 정도로 밤낮없이 일했다고 했다. 채윤호 ‘리니지’ 초기 아트디렉터의 일화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리니지’ 서비스 초기, 게임을 둘러보다 선착장 부근에 서 있는 한 유저를 발견했다. 1~2시간 뒤 다시 가 봤는데 그 유저는 아직도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궁금해서 말을 걸었더니 유저는 “배를 기다린다”고 했다. 게임 속에는 아직 배가 없었다. 그 유저는 아직 게임 속에 구현되지도 않은 배를 기다리며, 자기를 태워 갈 거라고 혼자 상상하고 있었다. 그 경험은 빨리 배를 만들어야겠다는 동기부여로 작용했다. 그것은 일이기도, 놀이이기도, 배움이기도, 성장이기도 했다.

‘척’하면서 더 노력했다는 최강록
죄수들 강제노동서도 의미 찾아
시급 노동자 ‘폄훼’ 쿠팡 김범석
인간은 동료와 일하며 사는 존재

인간은 떠안 듯 일을 맡지만, 그 일이 인간을 만들기도 한다. <흑백요리사 2>에서 조림 요리로 유명한 최강록 셰프는 “잘 못하는 조림을 잘하는 척”했다고 고백했다. 조림에 자신이 없었는데 남들이 잘한다고 하니까 그 바람에 다시 조림을 공부하고 연습하긴 했지만, 여전히 내심 ‘잘하는 척’만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는 말이다. 비록 ‘척’일지라도 그것은 최 셰프를 ‘연쇄조림마’ ‘조림핑’으로 만들었고, 우승으로 이끌었다. 맨날 아는 ‘척’을 하는 건 인공지능도 못지않다. 인간과 다른 것은, 척을 한다는 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인간은 ‘척’을 하면서 동시에 부끄러움도 느낀다. 그리고 척을 넘어서려고 더 열심히 일한다.

인간은 강제노동에서도 의미를 찾는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체험 수기에 가까운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 죄수들이 벽돌을 만들고, 땅을 파며, 집을 짓는 강제노동에도 가끔 열중해서 “빈틈없고 재빠르며 훌륭하게 일을 마치고” 싶어 했다고 적었다. 이런 일에는 그래도 생각과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물을 하나의 통에서 다른 통으로 옮겨 담았다가 다시 첫 번째 통으로 옮기라고 시키거나, 흙더미를 한 곳에서 다른 곳에 옮겨 쌓게 한 뒤 다시 반대로 하라고 시킨다면 죄수들은 모욕과 수치를 견딜 수 없을 것이며 그보다 참혹한 형벌은 없을 것이라고 썼다. 전적으로 쓸모없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서 C 클라크의 SF소설 <유년기의 끝>에서 완벽하고 매끈하게 통제되는 세계에 사는 인간은 별로 할 일이 없다. 공장은 자동으로 돌아가고, 인간은 주당 20시간만 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결정을 내리는 정도의 일만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아예 무기력해지진 않는다. “완전히 게으른 생활에 빠져들 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들”은 의외로 적었다. 클라크가 1953년 상상한 미래 인간의 모습도 단순하진 않았다. 클라크는 SF소설의 대가로 불리지만, 생전에 한 냉동인간 연구 기업이 시술을 제안하자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는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가는 삶은 견뎌낼 자신이 없다. … 우리는 감정적인 동물이다.”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다 숨진 노동자 장덕준씨의 근무 영상 자료를 보고 “그가 왜 열심히 일하겠어!? 말이 안 되지!!!”라며 성과급이 아니라 시급을 받는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김 의장에게 물류 노동자는 인간이라기보다 도구였고, 그 언젠가 로봇으로 대체될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은 도구도, 로봇도 아니다. 전국가전통신서비스노조가 지난해 5월 정수기 설치·수리 노동자 299명을 대상으로 왜 연차를 사용하지 못했느냐고 물으니 ‘동료에게 미안해서’가 1위였다. 담당 구역과 물량이 정해져 있어 본인이 쉬는 경우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줘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일은 동료와 나눠지는 것이기도 하다. ‘척’을 모르는 기계는 고장 나면 멈추지만, 인간은 미안해서 멈추지 못한다.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황경상 데이터저널리즘팀장 yellowpi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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