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2’ 우승자의 뜸들이는 말투, ‘정직한 맛’의 매력 넘쳐
잘난 척, 있는 척하는 말에 지쳐… 인간미 담은 서사가 준 청량감
잘난 척, 있는 척하는 말에 지쳐… 인간미 담은 서사가 준 청량감
일러스트=이철원 |
“조림을 잘하는 척하기 위해 살아왔습니다. 나를 위한 요리에서까지 조림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잘난 척, 있는 척하는 세상에서 모처럼 치유가 되는 말을 들었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2′의 우승자, 셰프 최강록 말이다. 스피치 점수를 매기자면 낙제다. 주어와 서술어는 뒤죽박죽, “아... 그러니까....” 밥도 아닌 말에 한참 뜸을 들인다. 이미 13년 전, 경연에서 우승한 실력자인데 티 한 번 안 낸다. 이렇게 쑥스러운데, 재도전할 용기는 어디서 났을지? 이 투박한 화법, 그런데 매력 있다.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숨죽이게 된다. 겸손함이 딱 그의 요리 같다. 심사평을 빌리자면 ‘어니스트(Honest·정직)한 맛’이다.
그의 어눌함이 사무치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말의 과잉’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 MS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스토리텔러(이야기꾼)를 채용한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AI가 유려한 문장을 쏟아내지만, 그럴수록 인간다움, ‘진짜 서사’에 더 목마르게 된다. 물 들어올 때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조림 인간’, 최강록에겐 확실히 서사가 있다. 문제는 서사가 종종 기만이 되는 현실이다. 20세기의 양심, 작가 조지 오웰은 이렇게 꼬집었다. “정치적 언어는 거짓을 진실처럼 들리게 하고, 살인을 존경스러운 것으로 포장하며, 헛소리(pure wind)에 실체가 있는 듯 착각하게 설계된다.”
국민의힘 게시판 논란을 보며 ‘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정치권 뉴페이스가 혜성처럼 등장하는 공식은 언제나 같다. 촌철살인 언변을 필살기로 대중을 사로잡는 것이다. 금방 대권에 직행할 것 같지만 끝까지 가는 사람이 드물다. 남에겐 날카롭지만 정작 본인 의혹 앞에서 말이 길어질 때, 참신함에 상처가 간다. 예외가 없다. 전직 당대표를 징계하는 것은 정당한가? 익명을 색출하는 것은 온당한가? 아니다. 당이 잃을 것이 더 많다. 그러나 당은 당, 본인은 본인의 책임만 말하면 된다. 가족이 썼는지 본인도 썼는지, 동료 의원 말마따나 기록만 확인하면 될 일이다. 이 간단한 사실을 털어가는 데 한참을 허비했다. 사과했지만 여전히 사실관계는 명쾌하지 않고 방점이 ‘정치보복’에 찍혀 있다. ‘이기려는 말’에 익숙한 탓일까.
환율이 1500원에 육박하는데 한국은행 총재는 어떠한가. 서학개미들이 달러를 사들여 그렇고, 위기설은 유튜버들이 퍼뜨리는 것이라고 한다. 돈 풀어 환율 오른 것도 아니며, 금리 올린다고 잡히지도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원화 가치가 크게 하락한 이유 중 하나가 과도하게 늘어난 유동성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말 어디에도 공복(公僕)으로서 송구함이나 책임감은 들리지 않는다. 환자는 아프다는데 의사가 병의 역사와 의미를 강의하는 격이다. ‘가르치는 말’에 익숙한 탓일까.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최강록 셰프. 결승전에서 그는 깨두부를 넣은 국물 요리 앞에 '노동주'라 부르는 빨간 뚜껑 소주를 놓았다. /넷플릭스 |
최강록 셰프는 이기려고 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를 위한 요리’라는 결승전 주제를 받아들고 놀라운 결과물을 냈다. 자신의 주특기인 조림 대신, 고되기로 악명 높은 ‘깨두부’를 선택한 것이다. 90분 중 상당 시간을 묵묵히 두부 젓는 데 할애했다. 9초도 자신을 위해 본 적 없는 요리사가 팔이 떨어져라 젓는 모습, 말로만 떠드는 스토리텔링을 넘어 ‘스토리두잉(Story-doing)’, 진짜 서사를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심사위원님들 취향과는 상관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깨두부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국물 요리를 내왔다. 노동 끝에 잠을 청하던 소주 한 병과 함께! 자신을 위했다지만 실은 본업에 대한 헌정이었다. “저한테 위로를 주고 싶었습니다. 매일 다그치기만 했는데....” 이 말에 나는 울었다. 일에 지쳐 맥주 한 캔 까면서 그게 쉬는 거라고 위로하던 밤이 누구에게나 있을 터다. 남에게 맞추는 ‘척하며’ 사느라, ‘척하는’ 말들을 듣느라 지쳤다. 그런 우리에게, 최강록은 묵직한 위로를 요리로 보여주었다. 마침내 우승하고도 “이겨서 좋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재도전해서 좋았다”고 할 뿐.
그런데 정말 왜 그리 말을 뜨문뜨문 할까. 식재료를 고르듯 신중하게 한 단어 한 단어를 고른다. 그 이유를 듣고 나면, 세상에 떠다니는 가벼운 말들을 압도하는 건 역시 어니스트, 정직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막 찾아봐야 돼요. 사실관계도 확인하고…. 물질적 사기보다 ‘지적 사기’를 치는 사람이 더 나쁘거든요. 그런 게 굉장한 공포감을 줘서… 잘못된 정보를 갖고 살게 하면 안 되니까.”
[조수빈 방송인·강남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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