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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어머니의 새해 첫 연극

조선일보 김일송 책공장 이안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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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어머니의 새해 첫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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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극장을 찾았다. 청력이 약해진 뒤부터 연극을 보여드리는 일이 부쩍 줄었다. 귀가 어두워서 내용 파악을 못 하실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에 본 작품이라면 기억을 더듬어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선택한 연극은 ‘더 드레서’였다. 박근형, 정동환, 송승환 등 연기 경력 도합 190년에 달하는 거장들이 번갈아 출연하는 작품이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연극은 평생 주연만 한 노배우의 그림자로 살아온 전용 의상 담당자(드레서) ‘노먼’의 하루를 비춘다. 노배우는 폭격 속에서도 무대를 지키는 존경스러운 예술가이지만, 무대 뒤에선 오만한 인간일 뿐이다. 노먼을 필요로 하면서도 함부로 대하고, 자신만만하다가도 금세 자기 연민에 빠지는 변덕스러운 인물이다. 이 입체적인 노배우 역은 박근형과 정동환이 맡아 열연한다.

반면 드레서인 노먼은 그 모든 모욕과 변덕을 감내하며, 의상은 물론 노배우의 스케줄까지 모든 걸 수발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노배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먼의 희생을 외면한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회고록을 쓰다가 돌연 세상을 떠나는데, 평생을 바친 노먼의 이름은 끝내 단 한 자도 적지 않았다. 귀퉁이에 이름 한 자 남겨줄 법도 한데.

작품 자체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이 연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송승환의 연기 변신이었다. 지난 시즌까지 노배우로 무대에 섰던 그가 이번에는 반대로 노먼 역을 맡았다. 군림하던 자리에서 냉대받는 역할로 내려오는 게 쉬운 도전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희귀 질환으로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장애를 전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노먼을 보여주었다.

공연장을 나서는 길, 어머니는 한참 동안 배우들 칭찬을 하셨다. 송승환 배우에 대해선 “앞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연기하느냐”며 감탄하셨다. 시력을 잃어가는 배우가 동선을 익히기 위해 수천 번 발을 굴렀을 고통을, 청력이 약해진 당신의 처지에 비추어 읽어내신 듯했다.

무대 위의 배우는 흐릿해진 시야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고, 객석의 어머니는 희미해진 청력으로 들리지 않는 소리를 좇는 밤이었다.


/김일송 책공장 이안재 대표

[김일송 책공장 이안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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