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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이모님은 코인전문가였다…암호화폐 안착한 고국 [동남아시아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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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이모님은 코인전문가였다…암호화폐 안착한 고국 [동남아시아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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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지난 연말 서울시와 고용노동부가 추진한 필리핀 가사도우미 시범 사업이 1년 만에 폐지됐다.

공식적인 인력 수입이 아니었을 뿐, 필리핀 여성들이 영어를 잘한다는 이점으로 인해 한동안 육아 도우미로 인기가 높았다. 필리핀은 10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해외에 있다고 할 정도로 노동 이주가 많은 나라다. 특히 돌봄이나 간호 영역에서 여성들의 노동 이주가 상당히 많다.

그런데 이주 필리핀 여성들은 대졸 학력이 절반에 이를 정도로 학력이 높은 편이다. 이들은 필리핀 국내 대졸 여성의 일자리가 부족하고 평균 임금이 낮기 때문에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이다. 국내 전문직 급여보다 해외의 단순한 돌봄 노동이 훨씬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에 처우가 열악해도 해외 이주를 택한다.

이들에게 학력은 전문직이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대신 배운 만큼 계약 조건을 이해하는 게 빠르고, 디지털 환경을 활용하는 데 능숙하다. 디지털 이해력이 높은 해외 취업 필리핀 여성 인력이 택한 길이 코인 송금이다. 개발도상국의 여성 인력은 보통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번다.

기껏 남의 나라에서 힘들게 돈을 벌었는데 가족들에게 송금하려니 은행 수수료가 만만치 않다. 큰돈을 보내는 것도 아니다. 남 보기에 적은 돈을 보낼 때도 은행에서는 세금 걷듯이 또박또박 수수료를 뗀다. 고국의 가족들은 어떤가. 송금받은 돈을 찾을 때 수수료 떼고, 환전할 때 또 수수료를 뗀다. 물론 은행 수수료도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래도 돈을 보내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아깝긴 매한가지다.

이전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으니 눈물을 머금고 수수료를 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디지털 천국이다. 필리핀의 노동 이주민들은 코인, 특히 스테이블 코인에 눈을 돌렸다.


스테이블 코인은 실제로 사용하는 화폐에 연동하여 가격을 매긴 암호화폐이다. 화폐 가치가 안정적이어야 하므로 보통 달러나 유로화가 기준이 된다. 가령 1코인이 1달러의 가치를 갖는 식이다. 직접 송금 대신 스테이블 코인을 이용하면 수수료를 대폭 낮출 수 있고, 환율 변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그에 따라 필리핀에서는 현재 USDC(서클), USDT(테더) 같은 스테이블 코인 송금이 활성화되어, 스테이블 코인으로 송금을 받고 바로 일상생활에서 쓰는 코인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실물이 아니라 암호화폐가 오가는 것이니 거의 실시간 송금이다. 코인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코인 송금이 늘어나자 필리핀 중앙은행(BSP)은 스테이블 코인·디지털 자산 서비스·전자지갑 업체의 합법적 송금 및 결제 인프라를 확대하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는 모양새다. 따로 은행 계좌를 만들지 않아도 휴대폰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각종 공과금은 물론 소소한 교통비도 코인 결제가 가능하게 연동을 시키는 중이다. 가벼운 지갑을 보면서, 송금받은 돈을 언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즉시 송금, 즉시 사용이 현실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 ⓒ 로이터=뉴스1 ⓒ News1 김지현 기자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 ⓒ 로이터=뉴스1 ⓒ News1 김지현 기자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암호화폐 특성상 송금 액수나 유통되는 화폐 총액 등이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또 오랜 세월 쌓여온 은행이라는 매체에 대한 신뢰를 코인 송금 업체나 전자지갑 서비스 업체에 대한 신뢰로 대체하는 문제도 있다. 실물 화폐를 코인으로 바꿔 송금하거나 소비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필리핀에서 코인 송금이 활성화되는 이유는 기업이 아니라 개인의 소액 송금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소액이면서 빈번한 송금일수록 은행 수수료를 절감할 수 있다는 게 코인 송금의 큰 장점이다.

반면 기업들의 대량 송금은 여전히 은행을 거칠 수밖에 없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소액 송금의 총합은 점점 커지고 있다.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2024년 필리핀으로의 개인 송금액은 약 383억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8.3%를 차지했으며, 2025년 송금액도 이를 상회할 전망이다.


여기에 맞춰 필리핀 여성 인력을 고용한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지에서는 이들을 위한 송금 서비스 업체가 특화되고 있다. 돌봄이나 가사 노동의 특성상 자유시간이 별로 없고, 고용주에 의존적인 이들을 위해 휴일이나 야간 이용을 쉽게 하고, 필리핀 현지에서 은행 계좌가 없어도 페소화로 즉시 쓸 수 있게 서비스하는 식이다.

필리핀 여성 이주노동자에게 스테이블 코인 송금은 불안정한 노동 속에서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지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코인 송금의 확산은 여성화된 노동 이주와 그들의 송금에 의존하는 필리핀의 구조가 결합한 결과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인은 투자를 위한 자산이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사회적 인프라가 된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필리핀은 동남아, 아니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스테이블 코인이 제도권에서 상용화되는 나라가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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