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니콜라 테슬라
에디슨과 승부한 경이로운 천재…인류를 ‘더 멀리’ 밝히다
188㎝ 키, 잘생긴 외모에 놀라운 탐구력…“끝내주는 사람”
[특별 사진전]
에디슨과 승부한 경이로운 천재…인류를 ‘더 멀리’ 밝히다
188㎝ 키, 잘생긴 외모에 놀라운 탐구력…“끝내주는 사람”
[특별 사진전]
니콜라 테슬라(40세), 1896, 작자미상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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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의 무리수
아브라함 아치볼드 앤더슨, 토머스 에디슨의 초상화, 1890, 캔버스에 유채, 114.3x138.7cm, 미국 국립 초상화 박물관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토머스 에디슨은 생애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그 남자, 니콜라 테슬라 때문이었다.
머리를 싸매는 발명왕. 그래도 그는 아직 실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까운 미래, 본인이 이 위기에 맞서기 위해 그런 무리수를 둘 줄은. 그의 직간접적 영향력 아래 여러 생명체가 감전사를 겪고, 끝내는 악명 높은 사형 기구까지 만들어지게 될 줄은.
하지만 결과부터 말하자면, 에디슨은 그러고도 이기지 못했다. 테슬라와 맞붙은 대결에서 말이다. 훗날 학계는 이 역사를 ‘전류 전쟁’으로 칭하게 된다.
쌓아올린 직류의 제국
1882년, 미국 뉴욕 내 에디슨의 직류 전력선을 거리 아래에 묻는 작업자들 [WP 스나이더] |
1880년대 중순, 미국.
당시 에디슨은 국가의 주요 전기망을 꽉 쥐고 있었다.
에디슨이 전기를 길들인 방식은 직류(Direct Current·DC)였다.
그가 볼 때 직류에는 장점이 많았다. 전기 에너지를 전선의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하는 것. 이는 위험성이 있는 전기를 그나마 쉽게 다루는 방법 같았다. 에너지의 일방통행이 이뤄지면 구조도 단순해진다. 즉, 흐름의 예측과 통제 또한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단점도 있었다. 특히나, 전기 에너지를 멀리 보내기가 어렵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에너지를 밀어내 흐르게 하는 힘, 전압(V). 당시 직류 체계로는 이를 높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송전(送電) 거리가 짧다면 그만큼 발전소를 더 많이, 더 촘촘하게 지으면 될 일이었다. 이 또한 다 돈이고, 전부 사업거리였다. 그래서일 것이다. 에디슨이 그가 가진 투자금과 기술력을 직류 시스템에 ‘올인’한 것은.
수백만볼트를 생성하는 확대 송신기 옆에 앉아있는 니콜라 테슬라(다중 노출 사진), 1899 |
그런데, 돌발 상황이 생겼다.
문제의 그 남자, 테슬라. 그 인물이 전기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들고 왔다.
그것은 교류(Alternating Current·AC)였다.
에디슨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도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교류에는, 그가 지금껏 쌓아올린 ‘직류의 제국’을 단박에 무너뜨릴 힘이 있다는 점을.
제국을 위협하는 횃불
테슬라의 교류 유도 전동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도면, 미국 특허 381978호 |
에디슨이 교류를 두려워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교류는 전기의 세기와 방향을 주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체계였다. 직류가 전기 에너지를 전선 한쪽으로 이어보내는 식이라면, 교류는 전기장(electric field)의 방향을 거듭 뒤집고 되돌리는 식으로 에너지를 내보낼 수 있었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교류 체계에서는 전자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 와 (+) 방향이 고정된 직류 체계와 달리, 전기장이 거듭 뒤바뀜에 따라 그 역할 또한 계속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전자는 전기장에 들어오면, 기본적으로는 (-) 에서 (+)로 가려고 한다. 그런데 교류 체계에선 그 양쪽의 자리가 수없이 바뀐다. 전자 또한 거기에 휘둘려 계속해 앞뒤를 오갈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전자 자체는 크게 이동하지 않는다. 다만, 어쨌건 끊임없이 왔다갔다하며 ‘치열하게’ 움직이긴 한다. 전기 에너지는 (굉장히 변덕스러운)전기장이 만드는 이런 변화, 그것을 일종의 파동으로 삼고 함께 실려 나아가는 구조였다.
내가 말을 하는 순간, 상대는 굳이 내 입 앞에 있던 공기를 맞지 않더라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백퍼센트 1대 1로 포갤 수 있는 예는 아니지만, 빗대자면 이런 식이었다. 그렇게 해 닿은 전기 에너지가 어떤 곳에선 열이 되고, 또 어느 곳에서는 빛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 천재의 잔상
테슬라의 교류 발전기 도면, 미국 특허 390721호 |
직류와 교류 사이 결정적 차이는 또 있었다.
테슬라의 교류 시스템은, 그 시절 에디슨의 직류 시스템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전압 조절이었다. 변압기(Transformer)라는 비교적 단순한 장치를 활용, 필요할 때 전압을 높이거나 낮출 수 있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테슬라의 교류는 에디슨의 직류와 달리, 전기 에너지를 더더욱 멀리 내보낼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면, 교류가 직류 대신 ‘표준’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최악 상황에선, 에디슨은 거의 부도나 파산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테슬라. 그 친구는, 처음 봤을 때부터도 심상치 않았지.’
에디슨은 손을 이마에 탁 얹었다. 눈을 감고, 몸을 젖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곤, 그의 잔상을 재차 곱씹었다.
“정말 끝내주는 사람”
니콜라 테슬라(20대 모습), 1879, 작자미상 |
“그 직원 말이오. 직접 만나보니 홀로 밤새워 일한 모양이던데…. 이름이 정확히 무엇이오?”
“멀끔하게 생긴 친구가 실력도 좋지요? 니콜라 테슬라라는 직원입니다.”
“그 문제를 말끔하게 풀었더군. 정말 끝내주는 사람이오(this is a damned good man).” 1884년의 어느 날, 미국 뉴욕.
에디슨은 여객선 오리건호에서 벌어진 사고의 수습 과정을 보고 받았다. 얼마 전, 오리건호의 전기를 제어할 수 있는 발전기가 완전히 망가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를 말끔히 수습한 이가 있었다. 그가 테슬라였다.
당시 테슬라는 에디슨의 전력 회사 내 직원으로 있었다.
그는 먹통이 된 발전기 앞에서 얼마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내 공구를 몇 번 가져다대더니, 그것을 완벽하게 고쳤다. 공학과 물리학 등 지식, 정밀한 손기술, 전기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있을 때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에디슨이 그를 눈여겨본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테슬라의 자서전 속 문장을 바탕으로 일부 각색한 일화다.
비범함을 넘어선 비범함
나선형 코일 앞에서 ‘자연철학 이론’을 읽고 있는 니콜라 테슬라, 1896, 작자미상 |
확실히, 테슬라는 그때부터도 빛나는 인재였다.
테슬라는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이었다. 1856년생인 그는 열네 살쯤부터 암산으로 적분 문제를 풀 수 있었다. 1875년에는 그라츠 내 제국 왕립 공과대학에 들어갔으며(당시 테슬라의 성적을 본 공과대학 학장이 학생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은 일류 중 일류’라며 극찬하는 편지를 썼다는 말도 있다), 곧 전기 분야에 푹 빠져 자신만의 실험을 이어갔다. 그 결과, 전기 에너지를 직류 아닌 교류로 다룰 수 있는 시스템을 구상할 수 있었다.
사실 교류 현상을 처음 알아본 건 테슬라의 앞세대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였다. 교류 발전기의 고안 또한 과거의 선구자가 해놓은 일이었다. 테슬라는 이 원리와 장치를 ‘인류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게끔’ 실용적으로 개량(改良)하는 데 성공한 케이스였다.
니콜라 테슬라, 1890 [나폴레옹 사로니] |
이후 테슬라는 프라하에서 공부를 더 했다.
이 무렵 테슬라는 미남자로도 이름을 알렸다. 188㎝의 큰 키, 옷도 잘 입고, 기억력과 언어 습득력도 좋아 어디 있든 주목받는 청년이었다. 약간 까다롭긴 하지만, 이성에게 거듭 추파를 받을 만큼 사교성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테슬라는 티바다르 푸스카스(전화 교환기 발명가)의 소개로 부다페스트의 전신 회사에서 일도 했다. 그는 근무 중 일종의 증폭기와 같은 장치를 줄줄이 고안했다고 한다. 당시 푸스카스는 바다 건너 미국땅의 에디슨과도 친분이 있었다. 푸스카스는 테슬라를 이 발명왕의 회사로 보냈다.
전설처럼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에디슨이 받은 추천서는 이랬다. 에디슨과 테슬라의 세계관이 마주한 순간이었다.
두 세계관의 충돌
발전기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불이 들어오는 전등을 든 니콜라 테슬라, 1898년경 [나폴레옹 사로니] |
하지만, 에디슨과 테슬라는 함께 1년도 있지 못했다.
테슬라가 일을 관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몇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른바 ‘미국식 농담’ 이야기다. 언젠가 테슬라는 에디슨 회사의 간부급 직원에게 새로운 기계 발명을 요청받았다. 성공하면 5만 달러의 보너스를 주겠다는 큰소리와 함께였다. 테슬라가 이를 보란듯 만들었다. 그런데, 그 간부라는 자가 얼굴을 싹 바꾸곤 “자네는 미국식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전기 천재’를 자극했을 수 있다.
또 하나 나오는 설은, 에디슨과 테슬라의 신경전이다. 에디슨은 직류를 믿었고, 테슬라는 교류에 집착했다. 둘 사이에는 자주 불꽃이 튀었을 것이다. 정확한 계기야 어쨌건, 테슬라는 사직서를 썼다.
1885년, 1월께. 테슬라는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당시 에디슨은 서른여덟, 테슬라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에디슨은 당연히 직류를 포기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 교류만의 특장점이야 당연히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 한편으로는 그의 회사가 깔아둔 직류 시스템 상당 부분을 ‘뜯어내야’ 한다는 점을 의미했다.
에디슨에게 벗어난 테슬라 또한 교류를 포기할 마음 따위 없었다. 우수한 기술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써먹어야 하지 않는가. 지극히 과학자적인 마음이었다. 에디슨 진영 대 테슬라 진영. 전류 전쟁의 막은 이렇게 오른 것이었다.
직류인가, 교류인가
연구소에서 뉴욕 법의학회 회원들에게 교류 전류로 말을 감전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뉴욕 법의학 저널, 1889, 작자미상 |
직류를 고집한 에디슨 진영은 교류가 “위험하고”, “실용성이 없고”, 심지어 “사람까지 쉽게 죽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직 이들 입장에서 보면, 그때는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남아있는 편지 등으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에디슨 진영은 한 발명가 겸 전기 기술자를 앞세워 엇나간 실험도 했다. 교류의 위험성을 알린다며 동네 떠돌이 개를 잡아와 전기 실험을 한 것이다. 이후에는 말 한 마리와 송아지 네 마리 등 더욱 덩치가 큰 동물을 데려와 실험실에 가두기도 했다. 동물들은 모두 교류 체계에 따라 감전사를 당했다. 일각에선 속임수를 썼다는 식의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직류로 할 때는 에너지를 덜 주고, 교류로 할 때는 일부러 에너지를 더 실었다는 의심이었다.
전기의자 상상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888년 6월30일자, 작자미상 |
그런가 하면, 에디슨 진영은 곧 사형용 전기의자의 탄생도 부추겼다. 이 또한 교류 방식으로 작동하는 장치였다. 얼마 후 약속의 날. 사형수를 의자에 앉혔다. 전기 충격을 가했다. 문제는 사형수가 좀처럼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여러모로 참혹한 장면이었다.
현장 기자의 증언이었다. 교류는 치명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주장을 속 시원히 증명하기에 실패한 듯했다.
로열티도 포기하다
조지 웨스팅하우스, 작자미상 |
이런 가운데, 테슬라는 그의 가치를 알아본 또 다른 인물과 손을 잡았다.
테슬라처럼 교류에 눈을 뜬 발명가 겸 사업가, 조지 웨스팅하우스였다.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의 회사에 교류 관련 장치 특허권을 팔았다. 목돈과 일종의 로열티(royalty)를 함께 받는 조건이었다. 런던 금융 위기, 아울러 에디슨 진영의 압박으로 웨스팅하우스사(社)가 돈이 마르자 사실상 로열티조차도 받지 않았다.
테슬라가 그런 초강수를 둔 배경은 무엇인가. ‘내 개인의 부보다는 인류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마음에서 그랬던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에디슨과의 앙금, 웨스팅하우스를 향한 신뢰, 승부욕, ‘내 생각이 맞다’는, 또 한 번 요동치는 ‘과학자적 마인드’….
웨스팅하우스의 회사는 이 덕에 굴하지 않고 교류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제대로 알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에디슨 진영의 교류 공포 마케팅에 맞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었다.
‘전류 전쟁’ 승자는…
웨스팅하우스 회사의 교류 시스템 홍보물, 1888, 작자미상 |
1893년께, 시카고 만국박람회 준비위원회의 회의 현장. 에디슨 진영과 테슬라 진영 모두 다음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시카고 만국박람회 내 수만~수십만개의 전등을 다는 구상. 에디슨 회사와 웨스팅하우스(테슬라 진영) 회사 양쪽 모두 “우리가 주도하겠다”라고 손을 든 상황이었다. 당국이 누구 편에 서느냐에 따라 수년간 이어진, 전류 전쟁의 승패가 기어코 판가름이 날 모습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웨스팅하우스 회사가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랬다. 계약을 따낸 건 테슬라 진영이었다. 그뿐인가. 얼마 후에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발전소를 두는 공사가 생겼는데, 여기서도 선택받은 건 직류 아닌 교류 시스템이었다. 테슬라 진영의 완승, 에디슨 진영의 완패였다.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다만 두 진영은 각자의 강점이 너무도 달랐기에, 이후에는 서로 기술을 공유하는 협력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특정 영역에 있어선 직류의 쓸모가 여전하기도 했다. 전쟁은 분명 전쟁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인류는 에디슨과 테슬라 모두를 필요로 했다. 요즘 들어서는 직류가 재차 주목받듯, 시대별로 주역에 오를 수 있는 전기 체계가 달랐을 뿐이었다.
에디슨의 근성
토머스 에디슨, 전기 램프, 미국 특허 223898호 |
최초의 전구라고는 할 수 없으나, 최초의 ‘상용화된’ 전구를 발명했다고는 볼 수 있는 에디슨.
에디슨은 전류 전쟁에선 패했지만, 전기 분야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을 남긴 게 사실이다. 알려진 대로 종종 뒤틀린 수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긴 했다. 그래도 상황이 어떻든 포기하지 않고, 될 때까지 해보려고 하는 근성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차츰 전기 업계와 거리를 뒀다. 전후로 사업을 몇 건 더 벌였는데, 이 또한 실패로 끝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조력자들이 있어 그렇게까지 어두운 말년은 보내지 않았다. ‘오늘 당장 승리하라.’ 에디슨은 이러한 당대의 논리로 맹렬히 살았다. 이 또한 쉽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그는 오랜 세월 ‘발명왕’ 내지 ‘마술사’ 등 칭호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테슬라는 무엇을 남겼는가
니콜라 테슬라, 날개 없는 터빈 도면, 미국 특허 1061206호 |
그렇다면 승자 테슬라는?
테슬라의 상황이 외려 더 복잡했다. 앞서 언급했듯, 테슬라는 전류 전쟁 중 자신의 핵심 특허권을 줄줄이 포기했다. 즉,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교류 시스템은 더는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로열티를 손톱만큼이라도 붙들 수 있었다면… 아마 평생 먹고 살 돈을 끌어모았을 것이다.
그나마 테슬라는 그간 사업 활동으로 끌어모은 목돈이 있었다.
테슬라는 그만의 실험실을 차리고, 하고 싶은 연구를 이어갔다. 원격 조종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동 보트,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 수 있는 일명 ‘테슬라 코일(Tesla Coil)’ 등을 줄줄이 선보였다.
“모든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초강력 무기’를 설계했다거나, 우주선을 직접 목격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발명 여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실험실이 불타 노트와 모형, 시연품 등을 잃은 경험이 있으며(당시 테슬라는 “너무 슬퍼서 무슨 말도 할 수 없다”고 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무선 전기 시스템을 세우려다 돈이 떨어져 포기해야 한 적도 있었다.
테슬라의 왼손 엑스레이 사진, 1896 |
그래도 나름 유명인으로 이름을 꽤 오래 떨쳤지만, 결국 말년에 들어선 그 또한 잊히고 말았다.
테슬라는 특히 나이가 들수록 답도 없는 고집불통의 면을 보였다고 한다. 가령 숫자 3에 병적으로 매달린다거나, 심해진 결벽증 탓에 스푼을 늘 광택이 날 만큼 닦는다거나… 그렇게 상상 이상으로 ‘피곤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언젠가부터는 비둘기에 집착해 호텔방을 새장으로 가득 채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날이 기묘해지는 그의 모습에 지인들도 하나둘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테슬라는 1943년, 호텔방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관상동맥 혈전증이었다. 당시 나이는 여든일곱 살이었다. 1931년, 에디슨이 여든넷 나이로 죽고서 12년이 더 흐른 후였다.
미래를 달린 인물
전력공학, 군수산업과 무선통신사업 등의 맥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사실상 무조건 테슬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과거 몇몇 위인전에서는 에디슨을 마냥 선한 발명가, 테슬라는 그와 충돌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Mad Scientist)’ 정도로 묘사하곤 했다. 그런 테슬라가 요즘 들어 재평가를 받는 건, 어쩌면 우리가 이제야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테슬라는 당대의 논리로 살지 않았다. 그는 미래를 달린 인물이었다.
한편 연방수사국(FBI)은 테슬라 사망 후 그의 노트 등 소지품을 서둘러 압수했다. 사흘여 조사를 벌이더니, “적의 손에 들어갔을 때 위험을 초래할 만한 것은 없었다”며 이를 다시 반납했다.
하지만 다수의 음모론자와 테슬라 추종자들은 지금도 FBI의 이 발표를 의심하고 있다. 몇 수 앞 미래를 내다본 그의 연구 일지가 정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았었는지를 놓고.
전기 실험을 하는 니콜라 테슬라, 1891, 작자미상 |
참고자료
테슬라 자서전, 니콜라 테슬라, 양문출판사
니콜라 테슬라 평전, W. 버나드 칼슨, 반니
전류전쟁, 마이크 윈첼, 다른미디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