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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날개 달아줬다”…문화예술 인큐베이터 자처한 기업들

헤럴드경제 고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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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 날개 달아줬다”…문화예술 인큐베이터 자처한 기업들

서울맑음 / -3.9 °
금호가 틔운 영재, K-클래식 주역으로
대원재단·세아이운형재단 메세나 합류
삼성, 음악·미술 ‘인프라 거인’ 존재감
LG, 공연계 게임체인저…문화성지 일궈
현대차, 인재 육성 넘어 지역 재생까지
① ②‘금호 영재’ 출신  피아니스트 조성진,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김선욱. ③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 올린 오페라 ‘루살카’의 바리톤 박종민(왼쪽부터), 테너 손지훈, 소프라노 서선영. ④‘한국의 메디치’ 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 예회장. ⑤삼성문화재단에서 악기를 후원받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⑥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 추모 음악회의 피아니스트 손열음. [금호문화재단·빈체로·헤럴드DB·서울시향·제공 ]

① ②‘금호 영재’ 출신 피아니스트 조성진,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김선욱. ③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 올린 오페라 ‘루살카’의 바리톤 박종민(왼쪽부터), 테너 손지훈, 소프라노 서선영. ④‘한국의 메디치’ 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 예회장. ⑤삼성문화재단에서 악기를 후원받은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⑥故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 추모 음악회의 피아니스트 손열음. [금호문화재단·빈체로·헤럴드DB·서울시향·제공 ]



14세기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꽃피웠던 것은 예술가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메디치가(家)가 있어 가능했습니다. 예술가들에게 후원은 지속가능한 예술활동을 위한 자양분이 되죠. K-컬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그들’이 있어 글로벌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헤럴드경제는 새해 기획으로 우리 예술가들을 뒤에서 후원해 온 ‘K-메디치’를 조명합니다.

“회장님은 한 번도 제게 어떤 곡을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시진 않았지만, ‘네가 좋아하는 곡을 나도 좋아한다’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지난 5월 고(故) 박성용(1931~205)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20주기 추모 음악회에서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이렇게 말했다. 고인은 손열음의 ‘키다리 아저씨’였다.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98년. 그는 강원도 원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 레슨을 받던 13세 소녀에게 첫 피아노를 선물한 사람이었다. “악기 걱정은 말고 피아노만 치라”고 말해주며 재능있는 아이의 성장을 지켜봤다.

국내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 생태계는 한국 메세나의 ‘대부’인 고(故) 박성용 회장이 설립한 금호문화재단을 필두로 진화를 거듭해왔다. 과거 기업의 메세나 활동은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방어적 명분’, 창업주의 ‘개인적 컬렉션’ 차원에서 이뤄졌지만, 현재는 기업의 정체성과 예술의 창의성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변해왔다. 예술은 기업에 ‘창의적 영감’과 ‘문화에 앞장서는 기업’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기업은 예술에 창작 기반과 경영 노하우를 서로 주고받는 동반자적 관계가 된 것이다.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은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은 다른 기업과의 이미지 차별화를 통해 고객의 충성도를 높이고, 유대감을 형성한다”며 “공동체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고 사회적 갈등을 치유해 장기적으로 기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금의 한국형 메세나는 ‘고립된 섬’이 아니다. 한 기업인의 용기 있는 시도가 또 다른 기업가에게 영감을 주고, 그것이 새로운 후원으로 용솟음치며 ‘메세나 이어달리기’의 위대한 유산을 만들어가고 있다.


‘K-메디치 원형’ 금호문화재단

지난 1998년, 금호문화재단은 만 14세 미만의 아이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 당시엔 ‘검증도 안 된’ 10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모험을 감행한다며 회의적이었지만, 이 무대가 문화계 인재의 ‘인큐베이터’가 될 지는 그 누구도 몰랐다. 재단은 발굴한 영재를 무대에 세우는 과정에서 그 어떤 차별 없이 프로와 같은 리허설, 무대, 대우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10대 인재들은 음악가로의 자존감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다.

발굴’과 ‘육성’을 일관된 가치로 밀어붙인 금호문화재단의 뚝심은 옳았다. 재단이 제공한 ‘무대라는 자산’은 한국의 10대 소년·소녀들이 세계를 제패하는 밑거름이 됐다. 1998년 ‘금호 영재’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나온 손열음, 김선욱, 조성진, 임윤찬 등 K-클래식 스타들은 모두가 ‘금호 키즈’다. 금호문화재단 관계자는 “완성된 아티스트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며 “한 명의 완성된 아티스트가 발굴되기 위해선 그 예술가가 첫발을 내딛고, 도전하며 발전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단의 지원은 집요할 만큼 지속적이다. 금호에게 메세나는 ‘스타 마케팅’이 아닌,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는 ‘농사’라 여기기 때문이다. 한 음악계 관계자는 “항공료 지원이나 행정 처리는 기본이고, 명품 고악기를 무상으로 대여해 주는 ‘금호악기은행’은 많은 음악가에게 날개를 달아줬다”고 말했다.


실제로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빈은 2016년부터 금호문화재단에서 후원받은 1794년산 주세페 과다니니 바이올린을 쓰고 있다. 그는 “악기 자체가 뛰어나다 보니 음악적으로 함께 성장하게 된다”고 말했다. 1763년산 요하네스 밥티스타 과다니니를 후원받은 김동현은 “워낙 오랜 시간 잘 관리된 좋은 악기이다 보니 연주 때 충분한 퀄리티가 나오지 않으면 내 잘못이라 생각해 스스로 더 엄격해진다”고 말한다.

최근엔 지원 영역을 피아노, 관악기, 타악기, 성악 등으로 확대하는 추세다. 미술 분야에서도 ‘금호영아티스트’를 통해 107명의 신진 작가를 배출하며 ‘젊은 예술가의 등용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개척자 뒤에 설계자…메세나 이어달리기

고(故) 박 회장의 선견지명은 영재 발굴 시스템의 안착으로 이어졌다. 금호문화재단의 영재 육성 시스템이 국내 기업에 “문화 후원은 미래에 대한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포트폴리오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국메세나협회 5대 회장(2003~2005)을 역임하기도 한 고인은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을 개별 기업의 선택적 활동에서 재계 전체의 의무로 격상시켰다.


그는 “기업이 문화를 소비하는 주체가 아니라, 문화를 생산하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며 동료 기업인들에게 메세나 활동 동참을 권유했다. 이른바 ‘메세나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대원문화재단과 세아이운형문화재단, 현대차정몽구재단 등은 금호의 손이 닿지 않은 빈틈을 채우며 각 재단의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우선 대원문화재단은 ‘클래식 음악’ 단일 장르에 집중해 고도의 전문적인 지원을 한다. 금호문화재단이 개척자라면 대원문화재단은 설계자인 셈이다.

대원문화재단은 독주 중심의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 ‘실내악’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를 후원했다. 국내 유일의 클래식 전문상을 제정한 것은 클래식 음악가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 재단의 1년 사업 중 대미를 장식하는 ‘대원음악상’은 1억 원의 대상 상금으로 예술가들의 자존감과 권위를 세워줬다. 첫 회 수상자는 정명훈이었다.

대원문화재단은 ‘무대를 완성하는 관객’을 위해 ‘관객 교육’으로 음악 생태계의 ‘마지막 퍼즐’도 맞췄다. 2007년부터 삼성경제연구소와 함께 ‘뮤직 앤 컬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미래의 청중과 음악인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은 오페라를 너무도 사랑한 고(故) 이운형 회장의 유지가 아내 박의숙 이사장(현 세아홀딩스 부회장)을 통해 계승됐다. 덕분에 ‘소수의 장르’인 오페라계에 다양성이 꽃피었다. 국립오페라단의 이사장이자 초대 후원회장이었던 고인은 해마다 한 편씩 희소한 오페라 공연을 공짜로 무대에 올린다. 지난해엔 벨리니 ‘청교도’, 올해엔 드보르작의 ‘루살카’가 공연됐다. “당신만 오페라를 알면 모두가 오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내주는 ‘아낌없는 투자’다.

2007년 정몽구 명예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현대차정몽구재단은 가장 진화한 형태의 ‘혁신 모델’을 선보인다. ‘재능 있는 미래 세대가 경제적 이유로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란 철학 하에 연주자들의 생애 주기를 관통하는 단계별 후원을 지원한다. 재능 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것은 물론, 등록금과 학습 지원비를 제공한다. 또 독주에만 익숙한 영재을 모아 ‘온드림 앙상블’을 하며 협업과 조화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음악 영재들은 이곳에서 음악캠프, 마스터클래스, 멘토링 클래스 등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관객 앞에 설 수 있는 무대 데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K-메디치 큰손들, 지역 재생까지 챙긴다

이처럼 K-메디치들은 탄탄한 시스템과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은 물론, 시장을 창조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며 예술계를 떠받치는 힘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일례로 삼성문화재단은 명실상부 ‘인프라 거인’이다. 1965년 설립, 21년 연속 기업 재단 중 지원 규모 1위를 자랑하는 막대한 자본을 해마다 투입한다. 국가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대규모 투자로 인프라 구축과 문화유산 보존에 집중한다.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을 통해 만나게 되는 블록버스터 전시들이 그렇다.

미술 전시 분야 뿐 아니라 음악 분야 지원도 막강하다. 1997년부터 ‘삼성 뮤직 펠로우십’ 등을 통해 유망 연주자들에게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네리 등 명악기를 무상으로 대여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 박수예, 랜들 구스비, 비올리니스트 이해수, 첼리스트 한재민 등이 이 혜택을 받고 있다. ‘보이지 않는 기술’에 주목, 피아노 조율사 양성사업을 해온 것은 삼성문화재단 ‘인프라 메세나’의 정점이다.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는 “순수예술이 지니는 가치의 중요성을 믿고,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LG연암문화재단은 플랫폼 경영의 선구자다. 재단이 운영하는 LG아트센터는 한국 공연 시장의 판도를 뒤흔든 ‘게임 체인저’이자, 동시대 콘텐츠의 성지다. 2000년 서울 역삼동에 개관, 현재는 마곡 시대를 맞고 있는 이곳의 히트작은 너무 많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개관 이듬해 초연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2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뮤지컬계의 ‘산업화 시대’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피나 바우쉬, 매튜 본, 로베르 르빠주, 이보 반 호브, 피터 브룩, 니나가와 유키오 등 세계적인 연극·무용 거장들의 작품을 한국 관객에게 선보였다. “대중적 흥행에 연연하지 말고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예술 공연을 국내에 소개하라”는 고(故) 구본무 LG 회장의 당부 덕분이다. 재단은 이 공연장에 지난해에만 283억4000만원을 지원했다.

현재차정몽구재단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협력해 진행하는 ‘예술마을 프로젝트’를 통해 혁신적인 메세나 사업을 진행 중이다.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계촌마을에서 열리는 ‘계촌 클래식 축제’는 문화예술이 어떻게 지역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마을 공동체를 재생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2015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폐교 위기에 처했던 계촌초등학교를 살리기 위해 시작, 학교와 마을의 운명을 바꿨다. 10주년 축제에선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지휘자 김선욱의 만남으로 엄청난 흥행을 거뒀고, 지난해 역시 그 열기를 이어가며 누적 13만7000명을 계촌으로 이끌었다. 인구 2000명의 시골 마을에 아이들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자 마을엔 활기가 돌고,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예술계에선 “기업, 개인을 아우르는 민간의 문화예술 후원은 어느 한 사람만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의 ‘레퍼런스(참고서)’이자 영감의 샘물이 된다. 한 공연예술계 관계자는 “재능을 알아보는 안목, 재능이 꺾이지 않고 자랄 수 있도록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지켜보는 시간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척박했던 환경이 비로소 ‘문화의 옥토(沃土)’가 됐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