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장관까지 나서도 못 잡는 환율
15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장경식 기자 |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한국 환율이 과도하게 높다고 언급했다는 사실이 전해진 후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일시적으로 크게 하락했지만 약발이 약 3시간을 못 갔다. 미국 경제 수장이 원화 약세에 구두 개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베선트 발언 배경에 대해 “원화 가치가 연간 200억달러의 대미 투자에 중요한 요소라는 미국의 상황 인식이 있다”고 했다.
베선트 장관의 ‘구두 개입’ 후 1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 환율은 12.5원 내린 달러당 1465.0원에 거래를 시작했다. 하지만 ‘베선트 효과’는 금세 사라졌다. 환율 하락을 달러를 싸게 살 기회라고 판단한 한국 투자자들이 달러를 사들였기 때문이다. 이날 오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고환율 우려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고 했지만 진정되지 않았다.
지난 15일 요동친 달러 대비 원화 환율. |
오전에 바닥을 찍은 환율은 다시 정오쯤 1470원대로 올라갔다. 오후 3시 30분 주간 거래 마감을 앞두고 정부 관계자가 외환 시장 안정을 위한 ‘추가 조치’를 거론했지만 환율은 찔끔 하락해 달러당 1469.7원에 거래를 마쳤다. 미 재무장관의 구두 개입이라는 초강력 카드에도 환율은 이날 7.8원 떨어지는 데 그쳤다. 시장에선 ‘심리적 마지노선’인 1500원 선을 다시 위협하게 됐다는 말이 나왔다.
◇내성 생긴 시장, 시장 탓하는 정부
지난달 24일 외환 당국의 강력 개입으로 환율이 하루 새 33.8원 떨어져 1449.8원까지 급락했던 것과 비교하면 개입 효과가 확 떨어졌다. 백석현 신한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당국의 조치로 환율이 한번 내려갔다가 얼마 후 바로 반등하는 현상이 최근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5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금리 결정에 대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이날 금통위가 5연속 동결을 결정한 배경에 대해 이 총재는 "환율이 매우 중요한 요인임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박성원 기자 |
환율이 1500원 선을 위협하자 외환 당국은 부랴부랴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한 외환 딜러는 “외환 당국은 이런저런 발언과 조치로 고환율 방어에 애쓰지만 ‘내성’이 생긴 것처럼 시장 반응은 점점 뜨뜻미지근해지고 있다”며 “시장에선 정부가 오죽하면 미 재무장관의 ‘입’까지 빌리느냐는 말도 나온다”고 했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지난해 9월 이후 국민연금·대기업·개인 등을 대상으로 10개가 넘는 고환율 대책을 쏟아냈지만 효과는 대부분 단기에 그쳤다.
한은은 지난 연말 수십억 달러의 외환보유액까지 투입하는 실개입에도 나섰지만 새해 환율은 다시 올랐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의 환율 대응은 근본 문제는 그대로 두고 단기 처방에만 그치고 있다”며 “외환보유액이라는 ‘실탄’을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율 ‘컨트롤타워’ 부재
현 정부, 청와대 고위직에 외환 시장 경험이 많은 전문가가 적고 환율 문제를 총체적으로 아우를 컨트롤타워가 안 보인다는 점도 문제로 거론된다. “정부의 강력한 능력을 확인하게 될 것”(김용범 정책실장) 같이 시장과 대립하는 듯한 발언, 대기업·금융사 질책 등 보여주기식 개입만으로 1400원대 환율이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된 시장 기대를 반전시키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한 관계자는 “지난 연말 강력한 개입이 이번 정부는 윤석열 전 정부의 환율 고점인 1487.6원은 안 넘긴다는 환율 방어 전략을 노출한 데 불과하다”고 하기도 했다.
환율 하락을 달러 저가 매수의 기회로 보는 ‘서학 개미(한국인 해외 투자자)’의 패턴은 15일에도 반복됐다. 이에 재정경제부는 또 추가 조치를 내놓겠다는 방침을 시사했다. 이날 최지영 재정경제부 국제경제관리관은 브리핑에서 “오늘 개장하자마자 증권사 해외 투자를 중심으로 굉장히 많은 달러 수요가 발생했다”며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추가 조치를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해외 주식을 국내로 들여오면 양도세를 면제한다는 강력한 조치도 효과가 열흘이 가지 못했다”며 “한·미 통화 스와프같이 시장을 확실히 안정시킬 대책 없이 미 당국자의 ‘말’만 얻어냈다고 해서 환율이 진정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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