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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재단 설립, 더는 미룰 수 없다 [안병욱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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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재단 설립, 더는 미룰 수 없다 [안병욱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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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욱 | 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해 11월, 약 5년간의 활동 성과를 담은 종합보고서를 발간하며 운영을 종료했다. 1기 위원회 종료 후 10년 만에 출범한 이번 2기 위원회는 2020년 12월부터 방대한 사건을 조사했다.



약 2만건에 이르는 사건을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에서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일부 사건은 규명 불능으로 처리되거나 각하·취하되었으며, 2천여건은 3기 위원회 몫으로 남겨졌다.



위원회는 제한된 인력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됐던 집단수용시설 등 대규모 인권침해의 실체를 규명함으로써 그동안 간과됐던 참혹한 인권유린 실상을 확인했다. 140명도 안 되는 조사관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왜곡·은폐된 과거사의 진실 규명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조사관들은 참혹한 과거사를 추체험하며 피해자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조사관으로서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 속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최근 여러 특검 수사들이 막강한 수사권과 풍부한 전문 인력을 갖추고도 실체 규명에 어려움을 겪는 것과 견주어 보면, 위원회가 맡아 수행한 과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국전쟁 시기 수십만명의 무고한 희생자, 반세기에 걸친 권위주의 국가폭력으로 인한 수많은 인권침해 피해자의 권리를 구제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일은 민주주의 인권정책의 최우선 과제이다. 그러나 과거사라 불리는 부당하고 억울한 희생과 피해를 바로잡는 일은 일반적인 정부 기구나 사법제도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렵다. 오늘날 다양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면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시적 비사법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가 창안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이미 중남미 여러 국가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 정부에서도 실행된 바 있다.



과거사 진실 규명은 사법기관의 수사나 재판과는 그 여건과 목적이 전혀 다르다. 진실 규명을 신청한 피해자와 유족이 조사관에게 내놓을 수 있는 근거란, 결국 아물지 못한 가슴속 상처뿐이다.



따라서 조사와 판단 과정에서 신청인의 주장을 형사재판의 형식주의나 민사소송의 입증 책임 같은 논리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 때문에 위원회는 건전한 상식을 지닌 인사들이 공동체적 책임 의식을 바탕으로 합리적 토론을 거쳐 결정을 내리게 하는,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비사법기구로 설립된 것이다.



그러나 위원회의 실제 업무는 이러한 비사법적 성격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한 상태에서 경직된 법 논리에 얽매일 때가 많았다. 정치적 정쟁과 무관하게 진실 규명 대의에 충실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는 한국전쟁기 정부 기능이 무너진 상태에서 극단의 생존 위기에 내몰린 주민들이 겪었던 고난과 고통을 거꾸로 이념 낙인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여야 정치권이 위원회의 임무에 대한 심중한 고려 없이 위원을 추천·선임한 탓이다.



이에 조사관들은 노조 활동을 정리한 백서에서 위원 선임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지적했다. “2기 위원회는 국가폭력의 상처를 세심하게 다뤄야 하는 본연의 역할에 정면으로 반하는 위원들에 의해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편향된 인물들이 다시는 위원회의 역사적 과업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위원 인선 과정을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하며, 기존의 법률가 중심 구성을 탈피해야 한다.” 조사관들의 지적처럼 편향된 위원들의 훼방은 위원회를 새로운 공안기관으로 오해받게 했다.



현재 국가는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배상 절차를 사법부에 떠넘기고 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개별적으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해야 하며, 그마저도 적대 세력에 의한 희생일 경우에는 국가 책임이 아니라는 논리로 배상에서 제외됐다. 한동안은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를 내세운 판결로 인해 법리에 익숙하지 못한 피해자와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우롱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법원 판결을 기다리던 고령의 유족과 피해자들은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나고, 국가는 이런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인다. 개별 소송 문제는 사건 조사 성격마저 왜곡시켰다. 많은 조사가 진실 규명의 본래 취지보다는 소송 대비에 치중됐고, 그 결과 역사적 성찰과 교훈으로 기억해야 할 과거사의 구조적 본질은 소홀히 다뤄졌다.



이러한 이유로 2009년 제1기 위원회 시기부터 진실·화해재단의 설립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왔다. 재단은 추가적인 진상조사 활동을 비롯하여 피해자와 유족의 권리 구제와 명예 회복, 공동체 평화를 위한 갈등 해소와 화해, 나아가 문화·학술 연구 활동까지 주요 과제로 삼는다. 아울러 관련 업무 중 인권 분야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국가인권위원회에, 독립운동 분야는 국가보훈부에 이관하여 협력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시급히 추진해야 할 재단 설립을 지연시킴으로써 제1기에 이어 제2기, 제3기 위원회를 반복적으로 운영해야 하는 비효율을 초래했다. 반면 ‘제주 4·3재단’과 ‘광주 5·18재단’은 이미 오래전에 출범하여 필요한 후속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진실·화해재단이 설립되면 궁극적으로 이는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내전으로 인한 비극적 희생을 구제하고, 갈등과 분쟁을 화해로 이끌어 인류 평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과거사 정리와 그 후속 과제로서의 진실·화해재단 설립은 인권유린의 역사를 극복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시대적 과제이다. 이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요구이자 민주주의 성숙으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만약 인권 침탈의 과거사가 극복되지 못한 채 후대에 숙제로 남겨진다면, 이는 곧 갈등과 불화를 대물림하는 일이다.



가족과 이웃으로 유대해온 공동체가 겪었던 전쟁의 참극은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아픔과 희생으로 남아 있다. 나라 안 어디도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비켜난 곳은 없다. 위원회 활동을 함께했던 법안 스님은 어느 날 내게 말씀하셨다.



“안 위원장은 어느 산을 오르든, 그곳 골짜기에 묻힌 원혼들의 안식을 비는 기도를 하십시오.” 이는 곧 모두를 향한 말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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