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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태도]작별의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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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태도]작별의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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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를 생각할 때면 왜인지 늘 그의 뒷모습부터 떠오른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속 그는 언제나 쓸쓸히 길을 걷는 모습이다.

눈 덮인 산속을 헤매던 빨치산(<남부군>)은 물론,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끝없는 구애를 퍼붓던 너드(<기쁜 우리 젊은 날>), 악연인 형사의 얼굴에 주먹을 꽂던 조폭 두목(<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물간 록스타를 꾸준히 뒷바라지하며 재기를 성공시킨 매니저(<라디오스타>)까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인상임에도 그의 존재는 왜인지 모두 춥고 언 길을 묵묵히 걷는 뒷모습으로 남아 있다.

몇년 전 봤던 만화 <룩 백(Look Back)>은 만화 그 자체를 사랑하는 두 소녀, 후지노와 ‘쿄모토’의 우정과 이별을 다룬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인물의 ‘등’을 집요하게 그린다. 주인공 후지노는 쿄모토를 이기기 위해, 또 쿄모토의 격려로 포기했던 만화를 다시 그리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창밖으로 무심하게 계절이 흐르지만 후지노는 미동 없이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킨다. 뒷모습에선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지만, 삐딱하게 앉은 후지노의 작은 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어떤 슬픈 얼굴을 마주했을 때보다 애틋한 감정이 차오른다.

이 만화를 읽으며 누군가를 ‘뒷모습’으로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다. 환갑에 대학에 입학해 등교하던 엄마, 늘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던 물리 선생님, 1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리코더 연습을 하던 친구. 내가 이들을 모두 뒷모습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그들이 내게 보여준 성실함에 대한 존경일지도 모른다.

손을 맞잡거나 뜨겁게 포옹하는 대신, 그저 그들이 쌓아 올린 시간의 무수한 퇴적을 등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일.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뒷모습으로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일. 그것은 아마도 언젠가 마주할 상실의 순간으로부터, 그들을 지독히 사랑하고 존경했던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서글픈 치환법이었을 것이다.

무언가와 작별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고단해지는 일이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평소보다 몇배는 지친 마음으로 자리에 눕는다. 해가 바뀌고 1월이 되어도 그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작별의 노래’라 불리는 쇼팽 연습곡 3번은 이맘때 가장 듣기 좋은 곡이다.


어떤 연주자의 버전으로 들어야 할지 망설여질 땐, 과감히 배호가 편곡하고 직접 가사를 붙인 가요 버전을 듣는다. ‘나의 기쁜 맘 그대에게 바치려는 이 한 노래를 들으소서. 그대를 위한 노래를 정답게 나의 가슴 불타올라, 나의 순정을 받아주소서. 그리운 님 떠나가면 나만 홀로 괴로움을 어이하리. 언제 다시 만나려나 그리운 님. 나의 순정을 잊지 마소서, 나의 순정 잊지 마소.’

이 곡은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에서 전쟁 때 헤어진 연인이 재회해 함께 부르는 노래이기도 한데, 느닷없이 먼 산을 보며 함께 노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왠지 괴상하면서도 마치 ‘K팝’을 인용해 전후 한국에서 ‘미망인’으로 살아가는 여자의 혼란을 풀어낸 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은 제작비가 없어 자신의 집을 세트장으로 만들고, 스태프들을 위해 직접 밥을 지어 먹이고, ‘감독’ 대신 ‘아주머니’라는 호칭을 견디며 이 영화 <미망인>을 완성했다.

안타깝게도 박남옥은 이후 자신의 두 번째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나는 가끔 박남옥이 그토록 사랑하던 영화판을 떠날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상상해 보고는 하는데, 나의 상상 속에서 그는 울지 않는다. 그는 결코 영화와 작별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또한 그는 영화를 언제든 다시 사랑할 수 있고, 언제든 다시 미워할 수 있는 가까운 열망으로 남겨둔다. 그는 내 마음속에서 영화와 작별하지 않으며, 언제나 나의 작은 자긍심이 된다.

해가 바뀌었지만, 요즘도 화사의 ‘Good Goodbye’를 듣는다. 미련과 후회를 끊어내고 작별조차 우아하게 하고 싶다는 이 노래에서 나는 미련없이 잊고 싶었던 수많은 이들의 뒷모습을 본다. 우아하고 싶다는 것은 바람일 뿐, 결코 작별할 수 없다는 미련이 구절마다 맺힌다. 언제부턴가 1월은 이런 슬픔과 함께 지나간다.

복길 자유기고가

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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