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일본의 新외교와 여운형의 협력
해방 전후사를 둘러싼 해석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어 왔으나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 일제가 1940년대 들어 조선어로 발간되는 신문들을 폐간하고 출판 활동을 탄압하면서 조선인의 시각이 담긴 당대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것이 한 원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종전, 미군정으로의 권력이동과 정부 수립 등을 더 깊이 연구하지 않고는 해방 후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편향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재미 학자 문유미 스탠퍼드대 교수가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해방 전후사를 다룬 많은 역사서는 중도 좌파 지도자 여운형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그 후신인 인민공화국(인공)의 등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중 독자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는 대목은,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자 지주층과 친일 세력을 기반으로 한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여운형과 인공을 ‘친일파’로 몰아 정치적 이익을 꾀했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역설이 있다. 여운형은 일제 총독부가 패전 직후 권력 이양 관리와 일본인 안전 보장을 위해 직접 선택한 인물이었다. 총독부는 왜 자신들의 협조자로 ‘극렬한 반일 인사’ 여운형을 택했을까? 한민당의 ‘친일파’ 공세는 전적으로 정치적 모략에 불과했을까? 내가 이 질문을 던진 계기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사료와 해방 후 미군정 기록 양쪽에서 여운형의 대일 협조 문제가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절박한 전황 속 ‘신외교’를 꿈꾸다
일본은 진주만 침공과 동시에 홍콩·싱가포르 등을 점령하며 동남아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미국과의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던 전략은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과 과달카날 해전(1942년 7월~1943년 2월) 패배 후 좌절에 부딪혔다. 주력 항공모함을 잃은 일제는 위기감 속에 외교 전략 전환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은 시게미츠 마모루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하며 ‘신외교’를 추진했다. 핵심은 중국 정부와 화평 조약을 체결해 전선을 축소하고, 점령 지역에서 대동아주의 선전을 강화하며, 일소 중립 조약을 기반으로 소련의 대일 참전을 막는 것이었다.
해방 전후사를 다룬 많은 역사서는 중도 좌파 지도자 여운형이 이끈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그 후신인 인민공화국(인공)의 등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중 독자의 감정을 강하게 자극하는 대목은,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자 지주층과 친일 세력을 기반으로 한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여운형과 인공을 ‘친일파’로 몰아 정치적 이익을 꾀했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역설이 있다. 여운형은 일제 총독부가 패전 직후 권력 이양 관리와 일본인 안전 보장을 위해 직접 선택한 인물이었다. 총독부는 왜 자신들의 협조자로 ‘극렬한 반일 인사’ 여운형을 택했을까? 한민당의 ‘친일파’ 공세는 전적으로 정치적 모략에 불과했을까? 내가 이 질문을 던진 계기는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의 사료와 해방 후 미군정 기록 양쪽에서 여운형의 대일 협조 문제가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절박한 전황 속 ‘신외교’를 꿈꾸다
일본은 진주만 침공과 동시에 홍콩·싱가포르 등을 점령하며 동남아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미국과의 전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던 전략은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과 과달카날 해전(1942년 7월~1943년 2월) 패배 후 좌절에 부딪혔다. 주력 항공모함을 잃은 일제는 위기감 속에 외교 전략 전환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도조 히데키 내각은 시게미츠 마모루를 외무대신으로 기용하며 ‘신외교’를 추진했다. 핵심은 중국 정부와 화평 조약을 체결해 전선을 축소하고, 점령 지역에서 대동아주의 선전을 강화하며, 일소 중립 조약을 기반으로 소련의 대일 참전을 막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해방 전 대표적인 ‘반일’ 인사로 알려진 것과 달리 조선총독부와 정치·외교를 둘러싸고 접촉을 이어간 정황이 사료로 확인된다. 조선 총독을 지낸 우가키 가즈시게(위 사진)는 상하이에 있던 여운형이 조선에 귀국하면 일본과 협력하겠다고 밝혔고 수차례 만났다고 미군정 심문에서 진술했다. 현재 미국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심문 조사서(아래 사진)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문유미 제공 |
이런 외교 연장선에서 1944년 가을,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조선·만주·중국을 방문했다. 육군대신, 외무대신, 조선 총독 등을 역임한 우가키는 당시 공식 직위는 없었지만, 고이소 구니아키 총리대신과 긴밀히 소통하며 전쟁 향방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고이소 총리의 승인 아래, 우가키는 군용 비행기로 도쿄를 출발해 서울과 평양, 만주국 수도 신징(현 창춘)을 거쳐 중국 점령 지역을 시찰했다. 그는 각 지역 엘리트들을 면담하고 상황을 분석해 일본 정부에 정책 방향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는 현재 일본 국회 도서관 헌정 자료실 우가키 문서에 남아 있다.
우가키는 조선과 만주의 상황을 안정적으로 평가했다. 전직 총독으로서 조선이 전쟁의 병참 기지이자 대륙 ‘개발’의 거점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드러냈다. 반면 중국에 대해서는 엘리트들이 일본의 패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으며, 교통과 치안이 매우 불안정하고, 공산 게릴라 활동이 확대되고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우가키의 대륙 시찰은 일본이 중국과 화평 조약으로 전선을 축소하고, 완전한 패전을 피하며 조선과 만주를 포함한 제국을 보존하려 했던 전쟁 막바지의 시도였다.
◇미군정의 조사: 친일 논란 속 여운형의 그림자
해방 후 미군정은 여운형이 일제 전범들과 협력한 사실이 있는지 신중하게 조사했다. 좌우 합작을 통해 구성될 한국 임시정부 지도자로 김규식과 여운형을 선택하며, 그의 ‘친일’ 관련 논란을 확인하려 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주일 미군 협조를 받아 우가키를 비롯해 고이소 구니아키, 도조 히데키,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보안과장 이소자키 히로유키 등을 심문했다. 이 심문 기록 전문은 현재 미국 하버드 옌칭 도서관에 소장된 버치 문서철에 포함돼 있다. 미군정은 요약 보고서에서 여운형에게 친일 혐의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심문서 전문에는 식민지 시기 그의 행적에 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이 들어 있다.
1947년 7월 귀국한 서재필(가운데)을 공항으로 마중 나간 여운형(맨 오른쪽)과 김규식이 함께 차에 탄 모습. /조선일보DB |
먼저 우가키는 여운형에 대해 “그는 극렬한 반일 인사였다”고 진술했다. “여운형은 상하이로 떠나 있었지만, 내가 조선에 부임한 뒤 귀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나는 그가 원한다면 돌아와도 좋다고 말했고, 그는 실제로 귀국했다. 상하이에서 돌아온 뒤 그는 조선이 일본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내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도쿄로 와서 몇 차례 나를 만났다. 그게 대략 10년 전의 일이다.”
우가키는 자신의 총독 재임 기간(1927년 4~12월, 1931년 6월~1936년 8월) 여운형의 요청에 따라 조선 귀국을 허락했고, 그가 일본과 협력하겠다는 말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술은 여운형의 공식 연보와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여운형은 1929년 7월 10일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3년간 수감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가키의 심문 조사서를 학술 대회에서 발표했을 때 일부 연구자는 여운형의 조선 귀국에 대한 진술 부분을 허위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록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여운형과 일본의 관계를 깊이 연구한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상하이에서 여운형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유가 명확하지 않고, 독립운동 핵심 지도자였음에도 체포 후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우가키가 육군대신이었던 시기(1929년 7월~1931년 4월)에 여운형의 귀국을 허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운형은 1919년 3·1 운동 후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신 주선으로 도쿄를 방문했다. 이때 유배 상태의 장덕수 동행을 요구했고, 육군 소좌를 통해 다나카 육군대신을 움직여 해결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보면 육군대신은 상하이 총영사관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움직일 권력이 있었고, 여운형은 그 과정을 직접 목격하며 유사한 방법으로 우가키에게 조선 귀국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미군정은 조선총독을 지낸 고이소를 심문하며 우가키의 대륙 방문과 여운형의 관계를 질문했다. 고이소는 우가키가 중국 순행에 여운형을 동행시키고 싶어 했으나, 실제로 여운형이 따라갔는지는 불확실하다고 답변했다. 여운형은 우가키의 중국 방문에 동행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가키가 1930년대 중반 이후 여운형을 10년 정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한 말은 명백히 허위 진술이다. 자신이 연합군의 전범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태평양전쟁 시기에 중국과의 평화 협상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가키의 일기에 따르면 여운형은 1940년과 1942년 도쿄를 방문하여 두 차례 모두 우가키를 만났고, 중국 문제 수습을 위해서는 난징의 친일 정부를 이끌던 왕징웨이보다는 장제스와 교섭하라고 조언했으며, 1942년에는 우가키가 직접 장제스와 교섭에 나설 것을 충고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8·15 전후가 아닌 1945년 2월쯤부터 여운형을 만나 조선의 민심 불안과 식량, 노동력, 교육 문제 등에 대해 자문을 구했으며, 그가 일본에 대해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진술했다. 보안과장 이소자키는 1930년대 초부터 조선인의 사상 동향을 조사·통제하는 입장에 있었다. 미군이 “여운형이 반일주의자라면 왜 연행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여운형이 실질적인 처벌을 받을 만한 반일적 행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또 “여운형이 경무국장이었던 니시히로에게 100만엔을 수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여운형이 상당한 돈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단일한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친일’
전직 총독들의 심문 내용을 소개하는 목적은 여운형을 ‘친일파’로 낙인찍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식민지 시기의 친일이란 단일한 범주가 아니라 다양한 동기와 상황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 강요된 협력과 적극적 선택, 생존을 위한 순응 등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특정 시각에서는 여운형과 우가키의 관계, 일제의 전시 중국 외교에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조언한 것, 총독부 관료들과 계속 접촉하며 친화성을 유지한 것을 단순히 강요에 의한 협력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따라서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로 건준과 인공을 중심적인 역사적 주체로, 그 대척점에 섰던 우익을 친일 세력으로 단순화하는 시각에는 한계가 있다. 해방 공간의 모든 사람이 겪어내야 했던 식민지의 복잡하고 폭력적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정치적 노선과 그 결과를 제대로 해석하고 평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여운형은 누구인가
1946년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을 펼쳤고, 다섯 차례 방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좌·우 세력으로부터 10여 번 테러를 당한 끝에 1947년 7월 암살당했다. 차녀 여연구(1927~1996)와 3녀 여원구(1928~2009)가 모두 월북해 정치 활동을 했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여운형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문유미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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